• “미륵사지는 그에게 삶의,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백제문화의 산 증인 노기환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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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관리자
  • 13.12.12 09: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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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益山)은 천년. 그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고도(古都)다. 백제의 흔적은 세월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백제문화의 끈기가 후세에도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얘기이다. 백제의 향기를 머금고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석탑, 익산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복원을 위해 지난달 26일 첫 삽을 떴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콘크리트 보수 후 약 100여 년 만에 다시 제 모습을 찾는 시작이다. 콘크리트를 바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일제강점기인 점을 고려한다면 제대로 된 복원이라 할 수 없었던 백 년 전의 모습이다. 이제 백제의, 우리의 문화유산이 제대로 제 모습을 갖춰간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2001년 10월부터 해체 및 보수공사가 진행된 미륵사지의 발자취. 그 이전부터 그곳에서 백제의 흔적을 보듬고 다듬으며 언제나 그곳을 지켜왔던 사람이 있다. 미륵사지의 산 증인이라 말하고 싶은 노기환 학예사. <휴먼다큐 삶>에서는 그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취재│모형숙 기자 편집│조일희 기자

   

 

 

 

 


“미륵사지는 그에게 삶의,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백제문화의 산 증인 노기환 학예사

 


큰 눈이 한번 내리고 제법 따스해진 12월 초순. 2013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겨울의 느낌은 그렇게 다가왔다. 자욱한 안개 사이를 비집고 미륵산의 위엄 있는 풍채와 동탑의 고즈넉함, 그리고 복원을 시작한 미륵사지 석탑을 둘러싸고 있는 복원 현장은 입구에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빛바랜 잔디의 잔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탁 트인 미륵사지의 정취가 내려앉은 안개 탓에 고즈넉함을 머금고 있었다.
이렇듯 역사의 흔적과 마주할 때면 비어 있는 아름다움이 가슴을 적셔온다. 칼날 같은 도심 속의 긴장감을 벗어나 느긋함과 편안함. 때로는 신비로움마저 만끽한다. 지금의 건축물이 화려하다면 오히려 역사 속의 건축물은 단순함이 어울린다.
우리나라 탑들이 아담함을 담고 있다면 미륵사지의 석탑은 웅장함이 어울린다. 가까이서 보기보다는 멀리서 훑어야 제대로 된 감상이 나온다. 수많은 직원이 오고 간 이곳을 21년째 묵묵히 지켜온 노기환 학예사(49).
우리의 백제문화에 대한 그의 뚝심은 웅장하고 묵묵한 미륵사지 석탑과 퍽도 닮았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 뒤편에 자리한 사무실에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사리장엄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현장에서 인터뷰는 이뤄졌다. 발굴과정과 동탑 복원, 서탑 해체정비, 유물에 대해 해박할 뿐만 아니라 기억력 또한 대단해 인터뷰 내내 막힘이 없다.

 

 

 

 

 

 


백제문화와 함께 한 집념과 인연의 흔적 21년

미륵사지 곳곳에 백제 흔적 남기는 게 ‘희망’

   

   

미륵사지 떠나고 싶지 않아 결혼 서둘러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잠시 머무른 것 빼고는 미륵사지와 함께한 인연이 거의 21년째네요. 시골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이 일이 적성에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요. 대학 때 윤덕향 교수님 덕분에 유적지가 제집처럼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죠. 윤 교수님은 제가 존경하는 분이신데 그분은 학생들을 대할 때도 예의가 먼저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곳에서 역사의 흔적을 놓지 못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분이시기도 합니다.”
전북대학교 사학과를 다니던 시절 군 입대 전 1985년 휴학하고 교수님의 권유로 남원 세전리 유적 발굴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것이 평생 미륵사지를 떠나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89년 여름 남원 아영면 두락리 발굴 현장은 도굴된 고분이었지만 봉분과 석실이 양호한 하나의 고분을 맡아서 주도적으로 발굴을 한 첫 경험이 있었는데 그는 그날의 기억을 영광스러운 자리였다고 표현한다.
물론 그렇게 중요한 현장을 교수님이 믿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 믿음이 지금의 노기환 학예사를 성장시켜 왔다.
그때는 천 년 전, 이천 년 전 미지의 세계가 신비롭게 다가왔다.
상상과 현실을 맞춰보고 그 속에서 나름의 당시 생활을 복원해 보며 그렇게 역사와 마주했다.
결국, 역사 속의 삶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지금 이순간도 훗날에는 역사가 된다는, 그래서 후손에게 고이 물려줘야 할 문화유산임을 생각할 때 그의 복원작업은 신중함의 연속이다.
고고학에 대한 열정은 대학 이후에도 이어졌다. 전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고고문화인류학과 대학원 박사과정도 수료했다.
1991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일용계약직으로 발탁돼 미륵사지 발굴(91~93년)과 동탑 발굴 ・ 복원(90~92년)도 지켜봤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그를 부여로 불러들이려고 하자 미륵사지를 떠나고 싶지 않아 부모님 봉양과 결혼을 핑계 삼아 익산에 머무를 수 있었다.
“결혼할 상대도 없었는데 저는 미륵사지가 그냥 좋았습니다. 이제 와 미안한 얘기인데 제가 장남이라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한다고 그랬죠.
바로 결혼은 했습니다. (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발굴, 미륵사지 금동향로
미륵사지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도 남달랐다. 2009년 발굴된 사리장엄의 현장에도 있었다.
비록 국립문화재연구소 직원만 발굴현장에 참여할 수 있어 직접 참관하지는 못했지만, 그 과정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이 발굴된 심주석을 무조건 열었던 것이 아니라 미리과학적인 방법으로 사전 조사를 했었습니다. 사리장엄이 발굴되기 몇 개월 전전자파를 이용해 심주석을 조사 했지요. 전자파의 파장을 분석하면 공간이 있거나 어떠한 물체가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데, 공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지요. 공간의 의미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죠.”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 1층 심주석에서 방형 사리공과 각종 사리장엄구 9,9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이 사리장엄 일괄품의 발견은 백제 및 고대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
사리장엄 얘기는 자세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 현재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 보존처리 완료를 기념해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노기환 학예사가 21년 동안 미륵사지에 머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발굴로 금동향로를 꼽았다.
“금동향로(보물 제1753호)는 유구 보호를 위한 통로 시설을 하던 중 목탑 뒤중원 금당 뒤편에서 발견됐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토방이 높으면 댓돌을 놓잖아요. 쉽게 말해 댓돌이 놓이는 자리쯤에서 발견됐죠. 고고학을 하다 보면 ‘감’이라는 게 생깁니다. 그곳을 파라고 지정해 줬는데 폭 0.5m, 길이 3m의 구덩이에서 금동향로가 나왔죠. 약간만 다른 곳을 팠어도 영영 찾지 못할 보물이 될 뻔했네요.”
정말 우연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던 길목에서 순전히 ‘감’ 하나로 우연하게 발견됐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동향로는 국내에서 한 번도 확인되지 못한 수각(짐승다리)향로의 첫 발견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다.
향로는 향을 불살라 연기를 피우는 그릇을 말한다. 잡귀나 잡념까지도 제거해 준다고 해 절에서는 물론 각종 제사의례에도 사용되었다. 금동향로 또한 백제의 불교문화와 견주어 볼 때 그런 용도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출토경위가 확실하며 완벽한 보존상태를 지닌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첫 예가 되는 통일신라 금동 수각향로라는 점에서 국보 백제금동향로에 버금가는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출토지의 정확성, 시기적으로 700년대 경으로 빠르고 희소성마저 지니고 있어 역사적 의미를 더욱 쳐주는 유물이다.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 탓에 학예사가 천직
그가 미륵사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금동향로나 사리장엄 때문만은 아니다.
젊은 시절, 이곳에 계속 있어야 할까를 고민하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야지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흙 속에 간직된 미륵사지의 흔적을 더듬으며 어느 순간 미륵사지는 그에게 인생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백제의 문화는 획일화되어 있지 않고 부드럽고 여유롭다.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닌, 21년의 세월은 그에게 백제문화의 숲을 볼 수 있는 안목도 자연스럽게 키워냈다.
“역사의 유물은 과거와 현재의 공감대입니다. 그래서 순리를 따르려고 노력해왔죠. 역사와 문화를 지금의 우리가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발굴도 중요하지만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정비하고 보존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답니다. 역사는 항상 넓은 의미로 바라봐야 합니다.”기다리는 법도 터득했다. 차분하고 진중한 그의 성격은 이 일이 천직이다.
발굴할 때, 역사문화와 마주할 때면 준비과정은 언제나 느긋하고 세심하다. 무언가 빠트리지 않기 위해 꼼꼼히 이것저것을 따진다. 하지만 준비 작업이 끝나면 실행에 옮기는 일은 일사천리다.
주위에서 ‘저 사람 왜 저래?’라는 말이 나올 만큼 집중력과 진행 속도가 빠르다. 열정이 묻어난다.

 


원칙과 소신, 끈기가 그의 경쟁력
21년 동안 항상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쉽게 발굴만 끝나면 다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질적으로 발굴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정비하고 보존하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숱한 오해들도 받았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묵묵히 진중하게 기다리고 소신껏 일을 하다 보면 오해도 풀리고 그의 우리문화에 대한 열정도 응원 받게 된다는 것을 세월 앞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 지금의 노기환 학예사의 경쟁력이자 지혜가 되었다.
그것으로 됐다. 어떤 오해든 원칙과 그것을 지키는 끈기 앞에서는 순리대로 풀리기 때문에 소신을 지키는 데 더욱 노력한다.
특히 ‘남에게 해가 되는 사람이 되지 말자!’라는 그의 소신처럼 소박하게 살아가는게 그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앞으로 남은 일생. 희망이 있다면 미륵사지 곳곳에 백제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현대적 조형물이 아닌 백제의 소박하고 투박한, 미륵사지 석탑 금동제사리외호처럼 섬세하고 화려한 유물들의 모습을 담고 미륵사지 주변 자연경관을 복구해 이곳만 찾아도 백제 속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을 흩뿌리고 싶다.
그래,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이곳을 찾을 때면 미륵사지 곳곳에서 백제 시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왔던 삶의 발자취가 마음으로 전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역사문화에 대한 유쾌한 상상만으로도 미륵사지가 한층 더 가까워진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
“알고 가면 더욱 경이롭다”

 

 


익산의 대표문화로 미륵사지 석탑을 손꼽는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불교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이 탑 사리공에서는 639년 1월 29일에 봉안된 사리장엄 일괄품이 창건 당시 그대로 발견되어 백제 및 고대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 2009년 석탑 해체 과정에서 출토된 사리장엄 9,900여 점이 보존처리 완료를 기념해 발굴된 유물 그대로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 내년 3월 30일까지 특별전시회를 가진다.


취재 l 모형숙 기자 / 편집 l 조일희 기자

 

 

 

 

공개되지 못했던 유물 9,900여 점 특별 전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최고, 최대의 석탑으로 2009년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면서 구체적인 석탑의 건립시기와 미륵사 창건의 성격과 발원자가 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라북도는 2010년까지 석탑의 해체와 발굴조사를 완료했으며 복원공사는 2016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일괄품은 백제와 신라, 중국, 일본 등의 고대 문화교류 양상을 새롭게 밝혀주는 불교미술품으로서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백제 미술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리장엄과 지진구는 백제의 사리봉안 방식과 의례를 밝힐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이 탑은 창건 당시 석탑의 사리공 구조 및 유물의 배치 양상을 처음으로 완전하게 확인한 예이자, 석탑 하부 구조의 조사를 통해서 석탑 하부의 사리 공양 의례 관련 유물을 본격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고대 백제뿐 만 아니라 동아시아 탑과 사리장엄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번 특별전은 그간의 보존처리 등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지 못했던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어 특히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전시 유물은 백제 무왕의 왕후가 639년 1월 29일 석탑 심주에 봉안한 사리봉영기, 3중의 사리기 그리고 다양한 공양품 등 9,600여 점과 2009년 말 석탑 기단부에서 발견된 토제나발을 비롯한 각종 지진구 200여 점이다. 당시 석탑 내 발견 유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량이지만 직물류나 도자(칼), 사리병편 등 일부 유물은 보존처리가 완료되지 않아 제외된다.
사리를 직접 봉안했던 금제사리내호와 금동제사리외호의 양식 및 제작기법은 7세기 전반의 백제 금속공예 및 미술 양식이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의 구성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 일괄품은 위덕왕 이후의 백제 왕실에서 행한 사리신앙과 장엄 의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 석탑은 미륵사지의 삼원 가람중에서 서원의 탑에 해당하며 이번 조사과정에서 사리공의 위치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심주석 내부에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리공이 마련된 심주석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석함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서 탑 내부를 방문하는 신자들은 중앙기둥 안에 봉안된 사리를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사리를 참배하는 구조를 형성했던 것이다.
사리공 안에는 맨 아래 바닥에 두께 1cm 정도의 방형 유리판을 놓은 후, 각종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개를 비롯해 도자, 금제 및 은제, 유리제 장신구를 비롯한 다양한 공양구들을 넣어 채웠으며 사리공의 맨 위 중심부에는 금동제사리외호가 놓여 있었
고 한쪽은 발원자와 제작연대를 새긴 금제사리봉영기가 놓여 있었다.
중앙에 놓여 있던 금동제사리외호 안에서는 금제사리내호, 유리제사리병, 사리 및 구슬을 포함한 각종 공양품이 순차적으로 봉안되어 있었는데 각 그릇의 내부는 모두 유리구슬을 비롯한 보주 등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이렇게 그릇 사이의 빈 공간을 구슬로 가득 채우는 것은 7세기 백제 특유의 사리장엄 방식으로서 주목된다. 가장 안쪽에 봉안된 유리제 사리병은 심하게 파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원래의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유리로 된 구슬 모양의 마개와 병목을 포함한 구연부는 확인된다.
사리공 내부에서 발견된 각종 공양구들은 발원자인 백제 왕후를 비롯해 왕실 및 귀족들의 희사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수리된 흔적이 있는 은제 관식이나 명문이 새겨진 금판, 과대 장식 및 각종 구슬, 청동합 6점, 철제 도자, 각종 직물류 등이다.
그중 6점의 청동합은 모두 납작한 원통형 합형식으로서 구연부의 처리 및 문양은 조금씩 다른 형식이다. 이 청동합들은 내부에서 구슬을 비롯한 각종 공양품들이 봉안되어 있어서 공양구로서 봉안된 것임이 확인됐다. 사리공에서 다양한 장신구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당시 불교계에서 발원자들, 혹은 의례 참석자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 장신구를 의례 도중에 바로 공양품으로 기증해 매납하는 사리공양 의례를 행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한편, 미륵사지 석탑의 기단부 조사에서는 사리공이 마련된 중앙 심주석의 남측 하부에서 여러 가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석탑 하부 출토유물들은 진단구, 혹은 지진구로 불리기도 하는데 역시 주요 기능은 탑의 중심인 사리를 공양하기 위한 공양구의 일종이다. 석탑 하부 출토품 중에는 흙으로 만든 불상의 나발편들과 은으로 만든 손톱모양 2점과 같은 보기 드문 유물들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양나라에서 부처의 조발공양 의례가 있었던 점과 관련해 사리장엄 의례의 일부로서 봉안된 성물로 해석된다.

 

 

사리장엄구의 제작기법과 양식적 특징
사리공에서 출토된 유물 중 백제 공예의 우수성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사리장엄의 핵심인 금동제사리외호와 금제사리내호이다.
금동제사리외호는 뚜껑과 동체 상부, 하부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주조하여 결합한 것이다. 동체 하부의 전에는 두 곳에 ‘ㄴ’자 모양의 홈을 마련하고 동체 상부는 2곳에 못을 박아서 이 부분을 끼워 맞춰 결합한 것이다. 동체를 상・하부로 분리해 제작한 것은 내부에 금제사리호를 봉안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으로 중앙에 내호를 봉안한 후 상・하부를 결합시킨 것이다. 별도로 열리게 제작된 뚜껑은 중앙에 연봉형의 꼭지가 있는데 꼭지와 뚜껑이 일체형으로 주조된 점이 특징이다.
금제사리내호도 역시 동체부분을 중심으로 상부와 하부가 분리되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제작기법은 금판을 두드려서 기물을 만든 판금 및 단조기법을 사용해 외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 내호의 뚜껑은 동체 상부에 땜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열리지 않으며 뚜껑으로서의 실제 기능은 없다. 이제까지 발견된 백제 금속 공예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작기법 양상을 보여준다.
이 두 사리기 이외에 7세기 전반의 백제 미술양식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는 사리공내에서 발견된 6번 청동합이 있다. 청동합 중에서 유일하게 문양이 새겨진 이 합은 모조기법으로 4엽화문과 팔메트 당초문 등을 표현했는데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회화적 느낌의 선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7세기 백제 미술의 뛰어난 미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에 보이는 다양한 공예기법과 양식은 백제의 장인들이 전통적인 백제의 공예기법, 특히 금속공예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문양 및 어자문기법과 같은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여 백제 특유의 미술 양식을 형성했음을 잘 보여준다.

 

 

사리장엄의 국제적 위상
사리공에서 다수 발견된 진주구슬들의 존재는 당시 백제가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지역과도 직접 교류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당시 진주구슬의 주요 산지는 동남아시아 베트남과 서역의 페르시아로서 7세기 전반 이전의 백제 유적에서는 진주의 존재가 확인된 바가 거의 없다. 미륵사지 석탑 공양품인 진주의 다량 매납은 아마도 7세기 전반 백제에서 처음 나타난 현상으로서 당시 백제와 진주 산지였던 동남아 지역과의 직접 교역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일괄품은 그동안 잊혔던 백제와 신라, 중국, 일본 등 고대 동아시아 문화 교류 양상을 새롭게 밝혀주는 매우 귀중한 불교미술품이다. 이들은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고 섬세한 백제 미술 양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들로서 백제 후기 불교 및 왕실문화의 다양성과 개방성, 국제성을 잘 보여준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들에 대한 기초적 연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앞으로 각 유물들에 대한 개별적인 고찰 및 동시대 신라, 고구려,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심도 있게 고찰해 동아시아 고대사의 새로운 이해가 이 유물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전시기간 : 2013년 11월 27일~2014년 3월 30일
・ 전시장소 : 미륵사지유물전시관
・ 전시문의 : (063)290-6799
・ 내비게이션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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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l0413 15.01.29 11:53:30
    보러갔었는데 멋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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