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정규직으로 산다는 것]“보험 들고, 첫 효도여행 희망이란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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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3.03.28 15:00:22
  • 조회: 1129

 

서울메트로 보안관 김진훈씨

정규직이 됐다는 소식을 전한 날, 중국인 무용수였던 아내는 “이제 한국에도 자리가 생긴 거네”라고 말했다. 월급 150만원에 1년짜리 계약직으로 일하던 서울메트로 지하철 보안관 김진훈씨(35)는 지난해 6월 정규직 처우에 준하는 무기계약직이 됐다. 그는 “내게 한국은 잔인한 세상이었고 잠깐 들렀다 떠날 곳이었는데, 이제 이곳에서 가족과 보낼 미래를 계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중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지내던 김씨는 아이 의료 문제 때문에 한국에 시한부로 머무르고 있었다.

김씨는 2012년 4월 정규직 전환 기념식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아내와 아이 명의의 보험을 들었다. 한 달에 30만원 정도 오른 급여 대부분을 여기에 썼다. 본인 보험은 전환이 되면서 회사에서 들어줬다.

주·야간 교대로 하루 9시간 근무하는 김씨의 연봉은 현재 대략 세전 2800만원 선이다. 기본급은 신분 전환 전과 비슷하고 호봉제를 적용받지 않지만 격월로 상여금이 나오고 전에 없던 보육수당, 교통보조금, 처우개선수당, 급식지원비, 복지포인트가 추가됐다.

 

비정규직 불안 떨쳐내고

정년 보장·안정된 수입
중국 장모 초청 가능해져

 

작년에는 부모 대신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와 이모할머니, 아내를 2박3일간 제주도로 여행을 보냈다. 할머니들에게 처음 구색을 갖춰 해본 효도였다. 복지포인트 74만원으로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했다. 서울메트로 직원에게 특가로 판매하는 관광상품도 샀다. 여든이 다 된 할머니는 “평생 그렇게 재미있는 여행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남는 복지포인트로 매일 1000㎖ 우유를 신청해 아이에게 먹였다. 우윳값 댈 엄두가 나지 않아 빈혈을 앓던 아이에게 우유를 마음껏 먹이지 못하는 게 한이던 김씨였다. 지난 겨울 직원에게 나오는 놀이공원 표로 아내, 아이와 함께 눈썰매장에도 처음 갔다.

올가을 김씨 가족은 지금 집보다 넓은 45㎡ 임대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이다. 정규직 전환 소문이 들려올 때 만든 주택청약통장이 있어 올해 청약을 할 수 있었고 운 좋게 당첨됐다. 처음 한국에 와 원룸에 입주할 때 서럽게 울던 아내는 새 집 모습을 담은 팸플릿이 닳아 너덜거릴 때까지 자꾸 펼쳐봤다.

무기계약직이 되니 중국인 장인, 장모를 초대할 자격이 생겨 7월에 모시기로 했다. 거주 비자만 있는 중국인 아내가 부모를 초청하려면 남편 직장이 필요했지만, 이전에 김씨는 일을 하면서도 직장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무기계약직이 된 뒤 보안관 일에도 애착이 생겼다. 김씨는 “직업의식도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더라”며 “일하다가 시민들이 든든하다, 고맙다고 하시면 벅차다. 봉사하면서 돈 버는 일”이라고 말했다. 인사를 받아주는 직원이 드물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역무실에 들르면 직원들이 “커피 마시고 가라”고 권한다. 회사의 각종 소식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는 지난해 봄 들어와 함께 정규직이 된 보안관들을 ‘2기 후배’라고 부른다. 김씨는 그들과 “너희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모습을 평생 지켜볼 사이”라는 이야기를 즐겨한다.

중국에서 살던 시절 김씨는 톈진에서 한·중 우호협회 중국지부 업무를 맡아 넓은 사택과 대기업 사원 못지않은 임금을 받았었다. 과거 중국에서 함께 일했던 이들은 김씨에게 “다시 올 생각이 없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김씨는 가장으로서 보장되는 정년과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때마침 아내는 둘째를 임신했다. 그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의미가 가족을 지키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갔던 지인이 죽어 돌아오는 불안한 중국 의료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 2011년 1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한국으로 왔다. 9월부터 서울메트로 지하철 보안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김씨는 이 일을 오래할 생각은 아니었다. 계약직으로 잠시 일하다가 아기가 자라면 무용수였던 중국인 아내와 함께 다시 중국에서 살 계획이었다.

5년 만에 찾은 모국은 냉혹했다. 원룸 보증금과 정착비용으로 빚 800만원을 졌고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공연기획사에서 영업 일을 시작했지만 대출이자와 자동차 할부금 40만원, 월세 30만원이 매달 빠져나갔다. 끼니까지 걱정거리였다.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택한 보안관 일이었지만 비정규직이 사람 아닌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줄은 일을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동료들과 ‘어느 역 역무원 누구는 우리 인사를 받아주더라’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겨울 근무복도 얇은 점퍼였다. 당장 중국에 가서 관광 가이드라도 하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아이를 튼튼하게 키우기 위해 참아야 했다.

그랬던 김씨는 무기계약직이 된 뒤 불안감이 없는 게 어떤 기분인지 처음 맛봤다고 했다. 그는 “대단한 건 아니어도 작은 변화들이 삶에서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며 “아이와 아내를 위해 버텼던 한국 생활에서, 거창하지만 희망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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