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책장에 처박아 둔 책, 다시 꺼내 보는 것이 정말 맛있는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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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 [http://www.khan.co.kr]
  • 12.10.31 14: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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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아옌데 박물관에서였어요. 약간 열린 문 사이로 빛이 들어와서 작은 무지개를 만들더군요. 그 장면을 제가 넋을 잃고 바라봤습니다. 그런 게 책입니다. 그 빛처럼, 어느 순간 내 속으로 들어와 넋을 놓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감각적인 독서가 정혜윤 CBS 라디오 PD의 책 <삶을 바꾸는 책 읽기>의 표지 사진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정 PD가 생각하는 책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넋 놓게 만들 만큼 삶에 빛이 되도록 스며드는 책, 나를 좀 더 그 빛을 향해 옮겨가게 만드는 책, 내 삶을 바꾸어놓을 정도로 나를 뒤흔들어 놓는 책.

그런 책을 읽은 적이 언제던가. 아니, 일생에 한 번이라도 그런 책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무엇이 좋은 책인지, 무엇이 나에게 맞는 책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 내 삶을 바꿀 정도로 값진 책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 삶 속에서 작은 해답을 얻고
그 지혜를 쌓아갈 수 있도록… 책은 도와주는 존재

▲ 진정한 독서행위는 ‘내 삶의 무엇을 바꿀까’
책 읽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

 

그러나 정 PD는 책을 통해 삶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방법을, 나름의 해답을 갖고 있는 듯했다. ‘독서의 계절’ 가을, 10월의 알파레이디 북토크는 지난 24일 정 PD의 책 이름과 같은 주제인 ‘삶을 바꾸는 책 읽기’로 이뤄졌다. 강연 주제와 잘 어울리는 북카페, 서울 중구 정동 문화공간 산 다미아노에서다.

“예전에 ‘종로서적’이 있던 시절, 거기서 책 구경을 하고 계단에서 책을 보는 게 낙이었어요. 책을 읽다 보면 외롭지 않았고, 제가 할 일이 많은 것처럼 느껴졌고,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뭔가 풍성한 사람처럼 느껴졌거든요. 종로서적에 앉아서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좋아했던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였어요. 그 책을 읽고 ‘책이란 게 재미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머리가 맑아지는 경험이었죠.”

 

정 PD는 소설 속 주인공 60대 자유인 조르바를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지게 됐다. 정 PD를 사로잡았던 글귀는 조르바의 짧은 말이었다. “네가 밥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조르바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그저 빵과 물과 포도주, 그리고 약간의 노동을 섞은 존재였다. 자신을 둘러싼 소박하고 단순한 일상을 유쾌하게 빚어낸 존재가 바로 조르바였다.

 

정 PD는 “콩나물, 김치찌개 등 내가 먹은 음식들을 더한 결과 내가 되는 것 같다”며 “물질이 정신이 되는 일종의 화학작용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인간이 그토록 다양한 삶을 살면서도 내밀하게는 그토록 비슷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놀랍고, 속으론 그토록 비슷하면서도 삶은 그토록 다르다는 것도 놀랍다”고 썼다.

 

정 PD는 살아오면서 몇 번,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조르바’를 만났다고 한다. 한 번은 경기도에 소재한 한 도서관에 강연을 하러 갔을 때였다. 그때 만난 이동도서관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는 도서관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당신이 책을 읽고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보라. 그러면 다음에 읽을 책을 추천해주겠다”고 말했다.

 

정 PD는 자기계발서를 독파하고 ‘1년에 100권 읽기’ 같은 경쟁적 책 읽기는 독서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진정한 독서행위는 “책을 읽고 ‘이제 어떻게 살지?’ ‘내 삶의 무엇을 바꿀까’를 생각하는 순간 이뤄지는 것”이라고 한다. 책을 읽고 잠시 멈춘 채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 나의 경험을 접목시켜 생각해보는 일, 그로 인해 나의 삶이 조금씩 달라지는 일…. 그런 총체적인 행위가 ‘독서’이고, 그 독서의 결과가 결국 나 자신을 말해주는 삶이 된다. 운전기사 아저씨를 통해 자연스레 조르바를 떠올렸던 이유다.

두 번째로 만난 조르바는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취재하면서 만난 한 어부였다. 자신을 스스럼없이 ‘자유인’으로 표현한 그는 “인간은 고생을 하며 산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어떻게 고생했는지를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인생의 답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생활 속에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고 나의 열정은 어디에 쏟아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감으로써 우리는 나 자신을 찾고, 인생을 만들어간다.

조르바를 통해 정 PD가 그랬듯, 책은 삶 속에서 작은 해답을 얻고 그 지혜를 쌓아갈 수 있도록 돕는 존재다.

 

“읽은 책을 어떻게 다 기억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어요. 책을 왜 기억하고 싶어 할까요. 바로 내가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믿지 않고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알베르 카뮈가 ‘인간의 삶 속에 빛이 되도록 스며들게끔 하고 싶다’고 했듯이, 우리는 좀 더 빛이 있는 쪽으로 옮겨나갑니다. 꾸준히 책을 읽다 보면 어느 날 알게 되는 변화지요.”

이날 강연 말미에는 ‘독서의 기술’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한 참석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반납해야 하니 열심히 읽는데, 직접 구입한 책은 잘 안 읽게 된다”면서 “이런 습관을 고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정 PD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인용하며 답변했다. “에코는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만 둬도 그 책이 머리에 옮겨간다’고 했습니다. 그 책을 샀다는 건 그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언젠가는 그 책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는 관심만 가진 채 읽지 않고 두었던 책, 혹은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행위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성장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책장에 처박아둔 책을 다시 꺼내 보는 것은 정말 맛있는 독서입니다. 만약 작년에 본 책을 다시 볼 때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작년과 지금 사이에 나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요. 인생의 지혜는 책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모든 책을 다시 읽을 필요는 없지만, 다시 꺼내 본 책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에게 싹튼 지혜의 흔적입니다.” 정 PD는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으로 “맘에 들었던 구절을 필사해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독서는 개인적인 행위이지만, 정 PD는 책을 통해 세상과 마주한다. 다양한 책을 통해 얻은 지혜와 깨달음들이 나 자신과 화학작용을 일으킴으로써 나는 날마다 새로운 ‘나’가 된다. 책에서 배운 가장 빛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바깥 세상에서도 볼 수도 있다. 책 역시 인간이 쓴 것이기 때문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나오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정 PD 자신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해주기도 했다.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유토피아를 발견하지 못했던 폴로는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지옥을 받아들이고 지옥의 일부분이 되는 것, 두 번째는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구별해내 지속시키며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 PD는 이 책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취재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에게 숨을 쉴 수 있게 하고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세상 속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고 구별하며, 사람들에게 지옥이 아닌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은 책이 그에게 말해준 것일까, 그가 책을 통해 확인한 삶의 방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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