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업뉴스] 이 동네 빵집이 잘나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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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 [http://www.khan.co.kr]
  • 12.07.10 13: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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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대구 ‘최가네 케익’ 최무갑씨

 

대구 동성로에 있는 빵집 ‘최가네 케익’ 사장 최무갑씨(71)의 스마트폰에는 갖가지 색을 넣어 치장한 예쁜 그림들이 수백장 들어 있다. 최씨가 케이크의 디자인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틈틈이 그린 것들이다. 이 그림들은 ‘최가네 케익’에서 케이크로 만들어져 손님들의 입과 눈을 즐겁게 해준다.

 

최씨는 반백년을 빵과 함께 보내며 빵 때문에 좌절하고, 빵 덕분에 끝내 성공한 사람이다.

10여년 전 그는 당시만 해도 쉽게 볼 수 없던 조각 케이크와 생딸기 케이크, 치즈 케이크, 고구마 케이크를 만들어 ‘대박’을 쳤다. 덕분에 ‘최가네 케익’은 우후죽순 생겨나는 유명 프랜차이즈 빵집들의 공세 속에서도 지금까지 최고 빵집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최씨의 아버지는 1950~60년대 대구에서 단팥빵으로 유명했던 ‘삼미제과’를 운영했다. 경주가 고향인 최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빵집에 다니면서 어깨너머로 제빵 기술을 배웠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19세 무렵부터 대구의 유명 제과점인 아버지 친구의 가게에 취직해 빵을 만들었다. 그 제과점에서 최고 기술자로 인정받은 그는 35세 때인 1976년 동성로 한일극장 옆에 처음으로 자신의 빵집을 열었다.

 


맛있는 케이크에 정신 팔려 사업 뒷전
40대 문턱서 30억원 부도내고 파산
직접 연구해 만든 조각 케이크로 재기
생딸기·축구공 케이크 등 잇따라 호평

 

 

그러나 첫 가게는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최씨는 “공장에서 빵만 만들던 기술자가 경영을 하려니까 잘 안됐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백화점 근처에 다른 빵집을 차렸다. 그러나 2년 만에 또 망했다. 당시 최씨는 제과점과 함께 슈퍼에 물건을 납품하는 유통업도 했는데 역시 사업 수완이 부족했다. 당시 부도액은 30억원에 달했다. 오갈 데 없는 ‘빚쟁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39세에 망할 수 있는 만큼 다 망해 본 최씨는 “사업은 나하고 안 맞는구나”라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나마 지인들이 “최씨는 열심히 일하니까 빚을 갚겠지”라며 많이 도와줘 어려운 시절을 넘길 수 있었다.

최씨는 결국 경주에 있는 도쿄호텔의 베이커리숍에 취직했다. 손재주가 좋은 최씨는 외국인 고객들의 입맛에 맞는 디저트를 잘 만들었다. 그는 외국에 나가 제대로 된 제과기술을 배운 적은 없다. 책을 붙들고 연구했고, 어디를 가든 메모지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케이크나 빵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의 케이크는 유력인사들에게도 유명했다. 고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은 최씨가 만드는 호두 캐러멜 케이크를 좋아했다. 그는 “호텔 기술직으로 있었는데 퇴직을 안 시켜주더라”며 웃었다. 결국 정년까지 ○○○간 호텔맨 생활을 했다.

호텔에서 퇴직한 최씨는 ‘큰 기술은 아니지만 제빵 기술자로 내 빵집을 성공시키는 꿈을 이대로 못 펼쳐보나’ 하는 생각에 다시 대구로 와 1999년 ‘최가네 케익’을 열었다. 약 43㎡(13평) 규모의 작은 가게였다. 외환위기 직후였던 터라 경기는 좋지 않았다. 대구 시내에는 이미 파리바게뜨, 신라명과 등 유명 체인 제과점들이 많이 생겨난 뒤였다. 주변에서는 “3개월을 못 버틸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와서 보니까 아무리 해도 그 사람들(유명 체인점)을 이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케이크 전문점을 택했다. 그는 “빵은 기본적으로 기계를 좋은 것을 써야 하기 때문에 목돈이 필요했지만 케이크는 내 손재주 하나로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평소 케이크 잘 만든다는 소리는 들어 자신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호텔에서 디저트로 내놓던 조각 케이크로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다.

최씨는 밤낮 가리지 않고 케이크를 구웠다. 아기 손바닥만한 미니 조각 케이크 3개를 1000원에 팔았다. 그때만 해도 시중에선 원형 케이크만 주로 판매됐고 조각 케이크는 잘 팔지 않는 때였다. 비교적 싸고 작은 케이크는 손님들을 끌어들였다. 최씨는 “사람들이 조각 케이크를 좋아하면서 가게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층에 작은 카페가 딸려 있었는데 최씨는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않고 카페에서 쪽잠을 자며 케이크를 만들었다. 그는 “그때가 제일 재밌었어”라며 “금고가 없어서 1000원짜리 지폐를 정부미 포대에 담기도 했다”고 말했다.

불경기였지만 ‘최가네 케익’은 계속 잘됐다. 돈도 좀 모았다. 최씨는 2003년 바로 옆 건물을 사들였다. 규모도 32평으로 커졌다. 그러자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보이기 위해 가게 이름을 ‘파리지엥’으로 바꿨다. 그런데 어느 날 단골이었던 한 기업의 대구지부 간부가 서울로 복귀한 뒤 오랜만에 대구에 와 ‘최가네 케익’을 찾다가 헤맸다는 얘기를 들었다. 최씨는 ‘최가네 케익’ 간판을 다시 달고 2004년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가네 케익’은 13년 전 처음 내놓았던 1000원짜리 미니 조각 케이크를 지금도 그대로 팔고 있다. 최씨는 “가게를 처음 열었을 때 팔았던 이 케이크만큼은 가격을 올리지 않을 작정”이라고 말했다.

 

아이디어는 그의 큰 자산이다. 미니 조각 케이크 외에도 화과자, 계절과일 케이크 등 젊은층 기호에 맞는 신제품을 꾸준히 개발했다. 생딸기 케이크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그는 김해에 내려가 딸기를 직접 공수해왔다. 가게 앞에 딸기 시럽을 마구 뿌린 적도 있다. 딸기향을 맡은 손님들을 가게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치즈 케이크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대구 시민들이 치즈의 신맛을 좋아하지 않아 몇 번이나 반품되기도 했다. 그래도 맛을 조금씩 바꿔 꾸준히 새로운 케이크를 내놨다. 그의 생크림 케이크도 독특했다. 최씨는 “둥근 케이크에 장미가 올라가고 모양도 거의 똑같았는데 나는 그게 싫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화려한 문양을 케이크 장식에 넣는 것을 시도했다. 중국 현지에서 3개월간 장식 그리는 것만 배웠다. 이후 ‘최가네 케익’에는 화려한 생크림 케이크가 등장했다.

‘최가네 케익’의 1층은 매장, 2층은 카페, 3층부터 5층은 공장(작업실)이다. 매장에는 색깔 고운 케이크들이 가득 차 있다. 하트 모양 딸기 무스 케이크, 사과 모양 생크림 케이크, 토끼 얼굴 모양의 조각 케이크 등 모양도 색감도 가지가지다. 공장은 매장보다 훨씬 넓다. 그는 “매장은 좀 작아도 공장은 커야 한다”고 했다. 빵을 만들 때는 공간이 넓고 편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맛과 청결에도 끔찍하게 신경썼다. 아직도 공장 벽 곳곳에 케이크 만드는 법과 ‘정리정돈’이라고 쓴 메모가 붙어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빵집은 보통 6개월 장사다.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 등 이벤트가 많은 계절에 수익이 많이 난다. 크리스마스 땐 1만개가 넘는 케이크가 팔린다. ‘최가네 케익’의 직원은 16명이고,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영업한다. 하루 매출은 300만~500만원 정도다. 케이크는 하루 평균 400~500개씩 팔린다. 원형 케이크는 2만~3만원대, 일반적인 조각 케이크는 4000원대다.

최씨가 말하는 ‘경영 비법’은 손님 맞춤형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최씨는 “손님이 딸기를 원하면 딸기를, 블루베리를 원하면 그걸 넣어준다”며 “케이크 모양도 손님이 그려달라는 대로 그려준다”고 말했다.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은 야구공 케이크,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은 축구공 케이크를 만들어 판다. 이곳 케이크는 전부 수제다. “냉동 케이크는 아무래도 맛이 없다”는 게 최씨의 생각이다.

그는 한국 제과 역사의 산증인이다. 최씨가 한창 제빵 기술을 익힐 즈음엔 밀가루 반죽을 모두 손으로 했다. 그가 요즘 천식으로 고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한국은 제과점이 처음부터 영세했다”며 “냉장고 하나 변변치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주 예전엔 한국에 재료가 없어서 케이크를 못 만들었는데 요즘은 여러 과일이 수입되고 여러 가지 맛을 낼 수 있게 됐다”며 “그만큼 손님 기호에 맞게 만들어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최가네 케익이 성공한 것 같다’고 하자, 최씨는 “마음만 편하면 다 부자”라고 했다. 그는 “아들들이나 후배들에게 항상 ‘작게 보라’고 말한다”고 했다. 이어 “처음부터 너무 크게 부자가 되려다보니까 힘이 드는 것”이라며 “하다보면 언젠가 표가 난다”고 말했다. 요즘 동네 빵집이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과 경쟁하는 데 힘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최가네 케익’을 열 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훨씬 더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씨는 동네 빵집이나 소규모 제과점이 살아남는 길은 ‘단일 품목’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갖춘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과 똑같은 방식으로 영업해서는 승부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제과점마다 같은 모양, 같은 맛의 빵과 케이크가 있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그는 2년 전 공장에서 나왔다. 대신 아들 2명이 5년 전부터 가업을 이어받아 3대째 ‘최가네 케익’의 제빵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아들들은 원래 일반 회사를 다녔다. 그런데 최씨가 케이크를 만들다 과로로 쓰러져 얼굴에 생크림을 그대로 덮어쓰는 사고를 당했다. 아들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제빵기술을 배웠다. 이제는 최씨가 공장을 떠나도 될 만큼 실력이 늘었다. 부인과 딸은 매장에서 일한다. 최씨도 때때로 들러 가게를 챙긴다. 빵집 이름 그대로 ‘최씨네 가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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