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산업] 잘 잊어 ‘탈’, 잘 잊어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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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11.21 16:15:49
  • 조회: 11800

 

‘천일의 약속’ 그녀의 안타까운 건망증…하지만 세상엔 고마운 건망증도 있다

 

요즘 인기인 김수현 선생의 <천일의 약속>이란 드라마 속 여주인공 이서연은 겨우 30세인데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 주차해둔 것을 잊고 택시를 타고 집에 오고, 회사에 핸드백과 휴대폰을 놓고 온다. 주인공 이서연 역을 맡은 배우 수애의 너무 곱고 예쁜 모습이 슬픔을 배가한다.

줄거리는 애절한 사랑이지만 난 사랑보다도 그 증세가 더 궁금하다. 그 드라마를 보면 “나도 혹시 알츠하이머병이 아닌가”란 불안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어릴 때 읽은 <몽테크리스토 백작> 책의 등장인물들이나 막심 고리키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복잡한 이름들은 생생히 기억나는데 정작 요사이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강물에 물을 뿌린 것같이 희미하다.

특히 최근에 온갖 것들이 자동화되면서 비밀번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은행통장은 물론 스마트폰 계정, 국세청을 비롯한 공공기관 사이트, e메일 계정 등등에 로그인할 때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하는데 매번 똑같이 할 수도 없고…. 6개 이상의 숫자와 알파벳을 사용하라니 머리가 터진다. 언젠가는 나름 잔머리를 굴려 ‘미스코리아 사이즈’로 비밀번호를 만들었는데 그것조차 35-24-36으로 했는지 36-24-35로 했는지 가물가물 자신이 없어졌다. 수첩에 메모하면 편리하지만 문제는 수첩을 너무 자주 잃어버린다는 거다.

 
그런데 나만 이런 게 아닌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털어놓는 에피소드는 다채롭다.

“어느 엄마는 딸 결혼식에 머리 단장하러 미장원에 갔다가 ‘어머, 파마할 때 됐네요’란 말에 파마하다 딸 결혼식에 늦어 난리가 났단다.”

“우리 사촌언니는 학원에서 늦게 온 수험생 아들이 배고프다기에 밥을 비비다가 맛을 보는데, 너무 맛있어서 아들을 위해 비빈 거라는 걸 잊고 다 먹었다는구나.”

“딸 깨운다고 딸 방에 노크해놓고는 자기 노크 소리에 깜짝 놀라 자기에게 ‘누구세요?’라고 했다는 친구도 있지.”

“머리를 클립으로 말고 운전한 후에 그대로 사무실에 출근한 적도 있어. 너무 민망해서 최신 헤어패션이라고 우겼지만.”

“그래도 겨울에 잠옷만 입고 있다가 위층에서 뭐 빌려달란 말에 코트 걸치고 가서, 그집 아저씨가 ‘차라도 한잔하고 가세요’란 말에 잠옷 입은 것 잊고 코트 벗은 것보단 덜 창피할 걸?”

건망증은 아줌마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 교수는 어느 회사 사장이 저녁식사 초대를 해서 우아한 식사를 하며 조언을 해줬다. 그런데 그 사장이 잠시 화장실에 간다고 나가더니 감감무소식. 혹시 화장실에 쓰러진 건 아닌지 확인해보니, 그 사장은 화장실에서 나와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가버렸단다. 나중에 사과를 했다지만, 그 비싼 식사값은 교수가 지불했단다.

쉰이 넘어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오면 외모의 평준화가 되고 연령대도 애매해진다.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은 가물가물한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참 애매하다. “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라고 상대편이 인사하면 덩달아 “그래. 너도 참 여전하다”라고 임기응변을 한다. 그런데 가끔은 그 사람이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거나 선배라 “너 많이 컸다. 반말을 하고”란 답을 해서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야구해설가 하일성 선생의 육성증언에 따르면 어느날 만취해서 집에 돌아와 소파에서 자다가 일어나 시계를 보고 놀랐단다. 새벽 4시! 아직 술이 덜 깨서 집인 줄도 모르고 자기 집 전화로 자기 집에 열심히 전화를 걸면서 중얼거렸단다. “이 마누라는 새벽부터 어디에 전화를 걸어 계속 통화 중이야?”

이혼은 인내심이 부족해서, 재혼은 건망증이 심해서 하는 것이란 말도 있지만 건망증이 그렇게 인생에 나쁜 영향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건망증, 망각이 때론 고마운 선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만일에 내가 당한 모욕, 모멸감, 내가 받은 상처, 분노를 모두 다 기억한다면 절대 지금의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을 게다. 친척들과도 인연을 끊어야 했고 몇몇 지인들과는 우연히 만나도 절대 인사조차 나누지 않아야 마땅하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잘난 척하는 유명 인사들을 볼 때마다 “저 사람은 13년 전에 이런저런 말을 했는데 이젠 다른 소리를 하고 있군” “아니 어떻게 7년 전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이 저렇게 착한 척을 할 수 있지?” 등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대인혐호증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뒤끝이 토끼 꼬리라 내가 당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분 나쁜 일들, 속상한 사건들, 또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숨고 싶은 순간들을 잊을 수 있어서 오늘도 무사히 살아간다. 부디 내 주변분들도 건망증이 있기를.

아름다운 기억, 떠올릴 때마다 마음에 불이 켜진 듯 환해지는 추억, 감사한 일들만 생각나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부끄러운 일들을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지는 선택적 건망증은 없을까. 건망증에 시달릴지라도, 그래도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죽음이 인생의 스위치를 끄는 그날’까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내가 감사할 일은 무엇인지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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