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향기] 76세 작가의 집념으로 되살아난 ‘허난설헌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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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10.11 15: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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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난설헌’으로 제1회 혼불문학상 당선된 최문희
76세에 문학의 꽃을 활짝 피웠다. 허난설헌을 통해서였다. 1935년 생으로 70대 후반에 접어든 작가 최문희씨(사진)는 글쓰기에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났으면서도 가부장제 체제에 짓눌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난설헌 허초희(1563~1589)의 삶을 소설로 옮겼다. 등단 24년째이지만 늦깎이로 소설을 발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그는 한땀한땀 수놓듯이 써내려간 소설 <난설헌>으로, <혼불>의 작가 최명희를 기리는 제1회 혼불문학상에 당선됐다. 국내 문학상 공모 사상 최고령 당선이다.
“예술가들은 가슴에 광기나 신기를 품고 있지요. 최승희, 피카소, 고흐, 박경리… 다 마찬가지예요. 각자 가슴 속의 활화산을 터트리는 방법은 다른데, 난설헌은 시로 승화시켰습니다. 극한 고통 속에서도 화관을 쓰고 촛불을 켜놓고,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무릉도원의 세계로 비약할 수 있다고 여겼지요.”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던 그는 허난설헌을 떠올렸다. 2009년부터 강릉 생가를 찾아보고, 학계의 허난설헌 연구, 중종실록, 허균의 저서 등의 자료를 찾아본 뒤 1년2개월에 걸쳐 원고지 2500장의 소설을 완성했다.
‘나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남편의 아내가 된 것.’ 난설헌은 도교를 공부한 아버지 허엽의 슬하에서 오빠 허봉, 동생 허균 등과 더불어 학문을 배우며 자유롭게 성장한다. 스승 이달의 사랑방에 함께 드나들었던 서자 신분의 최순치와 안타까운 사랑도 나눈다. 그러나 김성립과 결혼하면서 견고한 가부장제의 벽에 부딪쳤다.
시어머니, 남편과 불화했으며 어린 남매도 먼저 떠나보냈다. 그런 한을 아름다운 시로 달랬다.
이 작품은 ‘디테일하고 성실하게 이야기의 육체를 만들었다’(박범신), ‘허난설헌에 관한 책을 수없이 접했지만 이제야 그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그려졌다’(하성란) 등의 심사위원 평가를 받으면서 공모에 참여한 227편 중 1등으로 뽑혔다.
작가 최씨가 문학상에 당선한 건 이번이 네번째다. 53세이던 1988년 단편 ‘돌무지’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늦깎이로 등단한 그는 1991년 KBS의 중편소설 공모에 <숨쉬는 빛>과 <떠있는 망루>가 동시 당선돼 <숨쉬는 빛>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환갑이던 1995년에는 <율리시즈의 초상>이란 장편으로 제4회 작가세계 문학상을, <서로가 침묵할 때>란 장편으로 제2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해 한 해에 상금으로만 1억2000만원을 받았다.
“등단한 뒤에도 청탁이 없으니까 계속 문학상에 응모한 거죠. 나처럼 나이가 들어 작가가 되면 문단에 자리잡기가 쉽지 않아요.”
그는 2편의 장편 외에 <크리스털 속의 도요새> <백년보다 긴 하루> <나비눈물> 등 세 편의 소설집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제도권 밖 무명작가의 설움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문단에 나가 교류하기보다는 가정주부로서 살림하고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틈틈이 소설을 썼다”는 그는 “노력에 비해 성과는 부족하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최씨는 10살 때 서울에 올라와 숙명여중·고를 거쳐 서울대 지리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동기였던 오홍석 전 동국대 지리교육과 교수(76)와 결혼하면서 전업주부로 2남1녀를 키웠다. 그러다가 38살에 교편을 잡기 시작해 11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겨울마다 교실 난방 연료로 쓰였던 조개탄의 유독가스 때문에 기관지염이 악화돼 학교를 떠난 그는 50살을 넘기면서 본격적으로 소설 공부를 시작했다.
“6·25 전쟁 무렵에 책방에 갔다가 황순원의 단편소설 ‘목넘이 마을의 개’를 읽고, 아름다운 모국어에 완전히 매료됐죠. 김남조의 <목숨>이란 시집도 그랬구요. 그 때부터 어떤 일을 하든지 문학에 대한 지향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52년 국어교사이던 소설가 전광용씨의 추천으로, 막 창간된 월간지 ‘여성계’에 콩트를 실은 것을 계기로 문예지·교지의 단골손님이 됐다. 대학 다닐 때도 김남조 시인의 현대시 특강을 청강하면서 줄곧 시를 쓰고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교사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문학에 뛰어들면서 소설로 장르를 바꾼 최씨는 작가 오정희씨의 단편소설을 노트에 베껴 쓰면서 문장 연습을 했고, 작가 이문구·김원우씨에게 소설을 배웠다. 김원우는 “최문희는 꼭 글을 쓸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가 처음 쓴 장편 <율리시즈의 초상>은 남편의 조상들이 살았던 제주도에 갔다가 박물관에서 참나무로 만든 뗏목인 ‘테우’를 보고 구상했다. 뗏목을 타고 거친 파도를 헤치면서 육지로 가고자 했던 그들의 소외감과 정직하고 근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장편 <서로가 침묵할 때>는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가 갈등을 극복하고 편견을 버린 채 상대방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주된 줄거리다.
이번의 <난설헌>에서는 “도교라는 형이상학적인 종교에 매료돼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부유하는 느낌을 갖고 있던 난설헌의 아름다운 영혼을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백일홍은 맨살이다. 그래서 꽃 색깔이 저다지 진분홍인가. 있는 그대로 발가벗고 서 있는 나무라는데 생각이 모아진다. 그러자 새삼스럽게 그미의 눈가에 눈물이 핑그르르 어린다. 백일홍보다 나을 것 없는 인간들. 겹겹이 감추고, 숨기고, 억압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인간의 순수한 본성까지도 작은 틀 속에 가두려는 제도와 인습이 문득 진저리쳐진다.’(본문 중)
7일 출간된 <난설헌>(다산책방)은 당초 원고지 2500장 분량이었으나 책으로 묶이면서 1400장으로 줄었다. 그는 “한 가지를 쓰더라도 곱○○○어서 쓰는 게 내 스타일인데 개성이 흐려진 것 같아서 아쉽다”고 말했다. 초고에서는 난설헌의 시를 모두 인용했으나 학자들이 밝혀놓은 시인으로서의 난설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난설헌을 부각시킨다는 면에서 대부분 뺐다.
지금까지 세 편의 장편을 모두 공모 형식으로 발표한 그는 다음 소설도 준비 중이다.
“지리학을 공부한 만큼 현대문명의 대안적 공간인 ‘슬로 시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쓰고 싶어서 300장쯤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전광용·이문구·김원우·신달자 등 내가 만났던 작가 20여명의 에피소드를 쓰고 있지요.”
그는 76세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젊어 보인다. 지금도 하루 종일 컴퓨터를 켜놓은 채 원고 쓰고, 검색하고, 컴퓨터 바둑도 즐기는 그는 “늘 해온 일이기 때문에 특별히 힘들다는 느낌은 없다”고 말한다. 그의 노익장이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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