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향기] ‘속으로 하얀 피 흘렸지만…열매로 익은 나의 고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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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09.21 17: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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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신작 시집 ‘작은 기도’

3년 전 직장암 판정을 받은 뒤 수십 차례의 힘겨운 항암 치료를 견뎌낸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66)의 기도는 더욱 맑고 간절해졌다.
신작 시집 <작은 기도>(열림원)는 “신을 위한 기도가 한 편의 시가 되는” 그의 일상과 생각을 잔잔한 감동으로 담아낸다.
이 수녀는 “수도원에 살면서 단 하루도 기도하지 않은 날이 없지만 기도에 대한 갈증은 끝이 없다”고 말한다.
“몇 년째 암으로 투병 중이다 보니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이들이 참 많지만 감당을 못할 정도로 여러 종류의 기도를 내게 부탁해 오는 분들이 종파에 관계없이 더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어느 날 문득 기도하다가 기도를 받으며 세상의 순례를 마치는 모습을 미리 상상하며 눈물 글썽여보기도 합니다.”
그에게는 삶과 기도, 시가 구별되지 않는다. 보름달을 보면서, 차를 마시면서 기도하고 그것이 시가 된다.
“둥근 달을 보니/ 내 마음도 둥글어지고/ 마음이 둥글어지니/ 나의 삶도 금방 둥글어지네// … //온 우주가 밝아지니/ 나의 기도 또한 밝아져서/ 웃음이 출렁이고/ 또 출렁이고”(시 ‘보름달 기도’)
“ ‘차를 마시면 마음이 맑아진대,/ 몸에도 좋대, 오래 살아주렴’ 하는/ 친구의 다정한 목소리가/ 찻잔에 내려앉아/ 꽃으로 피어나는 아침을/ 기도처럼 마시는 삶의 고마움이여”(시 ‘차를 마시며’)
그가 생각하는 기도는 형식이 아닌, 마음이기에 큰소리로 웃는 것도 실컷 우는 것도 절실한 기도가 된다.
“어쩌다 한 번씩/ 마음의 문 크게 열고/ 큰소리로/ 웃어보는 것// 가슴 밑바닥까지/ 강물이 넘치도록/ 울어보는 것// 이 또한/ 아름다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어도/ 괜찮겠지요?”(시 ‘아름다운 기도’)
그러나 이번 시집에는 지인들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슬픔, 자신도 곧 그들의 뒤를 따라갈지 모른다는 번민도 드러난다. 이 수녀는 장영희 서강대 교수, 화가 김점선씨, 소설가 박완서씨 등 평소 가깝게 지냈던 동료들을 하나씩 암으로 잃었다. 그런 슬픔을 ‘슬픈 노래’란 시에 담았다.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의 죽음을/ 아직 다 슬퍼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슬픔 위에 포개져/ 나는 할 말을 잃네/ 이젠 울 수도 없네// 갈수록 쌓아가는 슬픔을/ 어쩌지 못해/ 삶은 자꾸 무거워지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랑하는 이들”
그는 자신이 지상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떠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두고 갈 것도 없고/ 가져갈 것도 없는/ 가벼운 충만함이여//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 // 눈을 감으면/ 희미한 빛 속에 길이 열리고/ 등불을 든 나의 사랑은/ 흰옷을 입고 마중나오리라”(시 ‘마지막 기도’)
이번 시집은 이 수녀가 생활하는 성베네딕도 수녀회 설립 80주년을 기념해 수도공동체에 헌정됐다.
또 미발표작 50여편에다 1999년 초판을 냈던 시집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에 실렸던 시를 보태 88편으로 구성했는데, 이는 1968년 첫 서원을 하고 수도원에 입회할 당시 주어진 이해인 수녀의 고유번호가 88번이었기 때문이다.
이 수녀는 시집 뒤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내가 꼭 하고 싶은 것들’이란 짧은 산문을 붙였다.

어떤 보물

세상에서 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
내 마음 속의 언어들

깨고 나서
더러는 잊었지만
결코 잊고 싶지 않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꿈들
모르는 이웃과도 웃으며
사랑의 집을 지었던
행복한 순간들

속으로 하얀 피 흘렸지만
끝까지 잘 견뎌내어
한 송이 꽃이 되고
열매로 익은 나의 고통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의 보물이라 외치고 싶어

그리 무겁진 않으니까
하늘나라 여행에도
꼭 가져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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