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후두둑… 쪼르륵… 누구냐, 비가 내릴수록 더 정결해지는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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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07.14 15: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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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오는 날 좋은 그곳, 부여 궁남지

 

비오는 날 연꽃연못에 가봐야 한다. 연(蓮)이 동물처럼 살아 움직인다. 빗속에서 연꽃 향에 취기가 오른 채로 부여 궁남지(宮南池)를 걸었다. 걷다보면 ‘연꽃 향에 취한다’든지 ‘연꽃으로 핀 극락정토’라든지 하는, 상투어의 실체를 맞닥뜨린다.

‘궁남지’ 하면 ‘연꽃’이 떠오르지만 사실 연꽃은 궁남지의 주인이 아니다. 궁남지는 말 그대로 ‘왕궁 남쪽의 연못’을 가리킨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의 별궁 연못. ‘왕궁 남쪽에 연못을 파고 이십리에서 물을 끌어들였다.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섬을 쌓아 방장선산을 본떴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재현해 놓았다. 우리 역사에서 정원과 연못을 조성했다는 최초의 기록이므로 궁남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이다.

연꽃은 정자를 품은 커다란 연못 주변에 널따랗게 심어져 있다. 무려 39만6700여㎡의 거대한 부지다. 부여군 사적지관리사무소 이계영 주무관은 “이곳에 연을 심기 시작한 것은 2001년 6월부터”라며 “백제 불교 문화의 상징으로 군에서 조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이야 어떻든 지금, 사람들은 7~8월이 되면 신비한 연꽃을 피우고 있을 궁남지를 떠올린다. 백련·홍련 등 색색의 연과 밤에는 잠을 자는 수련, 가시연, 왜개연 등 다양한 종의 연꽃이 있다. 그 중에는 전설 중의 전설 ‘오가 하스’ 연꽃도 있다. 연 씨앗은 생명력이 길다고 알려진다. 2000년에서 길게는 1만년에도 이른다고 한다. 지난해 경남 함안에서는 고려시대의 연 씨앗이 700년 만에 꽃을 피워 화제가 됐다. 오가 하스는 1951년 일본의 식물학자 오가 이치로 박사가 2000년 전 유적지에서 발굴한 연 씨앗을 발아시키는 데 성공한 연꽃이다. 궁남지에 이 종을 옮겨다 심어놨다. 이 주무관은 “입구 쪽에서 포룡정 정자를 바라보고 정중앙에서 오른쪽 옆에 피어있다”고 알려줬다.

연꽃이 핀 연못 사이를 걸으며 ‘전설’이니 ‘신비’니 하는 말들에 대해 생각하는데, 후두둑 후두둑, 뭘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잠시 후, 시원하게 비가 쏟아졌다. 정수리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기도 전에 둥글넓적한 연잎이 먼저 알고 소리를 낸다. 사람들이 근처 오두막으로 뛴다.

비가 조금 잦아든 뒤 우산을 쓴 채 다시 천천히 연꽃 사이를 걸었다. 연못에는 연꽃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나무다리가 사이사이에 놓여 있다. 그 위에 서서 비바람에 뒤틀린 백련을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쪼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송사리나 오리 혹은 개구리가 지나는 소리인가 싶어 연잎 아래를 들여다보는데, 그 소리가 아니다.

조금 떨어진 연지에서 홍련을 바라보는데 또 한번 ‘쪼르륵’. 알고보니 연잎이 여기 저기서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끄덕이며 ‘쪼르륵’ ‘쪼르륵’ 소리를 낸다. 빗물 쏟아내는 소리다. 비가 내리면, 물을 머금지 않는 연잎 위로 빗방울이 수정처럼 작게 흩어지고, 그렇게 조금씩 쌓인 빗방울이 어느 정도 무거워지면 연잎은 중심을 잃고 그것을 뱉어낸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정결한 잎으로 돌아온다. 유순한 자연의 순리.

바람이 불 때는 또 어떠한가. 커다란 연잎들이 연한 뒷면을 드러내며 부드럽고 느릿한 춤을 춘다. 비가 잦아드니 그 때부턴 연꽃 향기가 짙게 풍기기 시작한다. 방금 먹고 온 연잎밥의 향기가 아직 입안에 있는데, 이제 아예 온 사방에서 연향이 진동한다. 극락정토가 따로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에선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서 신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 상상도 무리가 아니다.

연꽃 연못 아래는 진흙탕이다. 연못 정비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긴 장화를 신고 진흙 속에서 잡풀과 상한 연 줄기를 솎아내고 있다. 흙탕물이 일어나는데 그 곁에서도 연꽃은 혼자 순결하기 짝이 없다.

 
 
넋을 잃고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포룡정’을 만난다. 궁남지의 중심인 커다란 연못 가운데 섬이 있고 그 위에 ‘포룡정’이란 정자가 있다. 기다란 목조 다리를 따라 걸어들어갈 수 있다. 비가 오니 그 안에도 사람이 그득하다. 포룡정은 1971년 연못을 복원하면서 만들었다. 현판에 ‘국무총리 김종필’이란 서명이 있다. 부여 출신의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씨가 현판 글씨를 썼다. ‘포룡정’(抱龍亭)이란 이름은 서동 탄생설화를 반영해 붙였다. 궁남지 자체를 ‘서동 공원’이라고도 부르는데, 우리에겐 ‘서동요’로 많이 알려진 그 서동이다. 백제 무왕의 아버지인 법왕의 시녀였던 여인이 연못가에서 홀로 살다 용신과 통해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이며, 그게 곧 무왕이란 설화. 포룡정은 말하자면, 용을 품은 정자인 셈이다.

이 연못은 가운데 섬과 정자, 특히 둘레에 심어진 버드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답다. 백제는 정원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사람 노자공이 일본 황궁의 정원을 꾸며 일본 아스카 시대 정원의 원류가 됐다는 기록도 있다. 연못 둘레를 따라 걸으면 각종 야생화들이 피어있고, 황포돛단배도 한 척 볼 수 있다. 백제 때는 이곳에서 뱃놀이도 했다는데, 옛 풍류가 새삼 부럽기도 하다. 주택가가 바로 근처에 있어서 운동나온 주민들이 많았다. “밤이면 조명이 들어오는데, 야경도 운치있다”고들 입을 모은다.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지 않고 40번국도를 타고 공주 시내를 거쳐 천안까지 갔다. 공주 시내 천변에도 연꽃 군락이 보였다. 입에선 종일 연잎 위에서 피리를 부는 힘없는 소시민 개구리가 나오는 만화 ‘개구리 왕눈이’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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