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미리 걸어본 ‘태안 해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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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06.22 15: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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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나만의 작은 해변을 만났다

걷는 것은 자세히 본다는 것이다. 태안 해변길을 걸을 때 가장 큰 즐거움은 이름이 나지 않은 작은 해변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아직 본격 휴가철도, 주말도 아닌 오후. 한적한 해변엔 개 두 마리와 사람 두 명만이 해안선을 따라 뛰고 있었다. 태안 지역은 2007년 허베이스트리트호 원유 유출사고 이후 힘든 나날을 보냈다. 생태 복원 노력이 지속됐지만 지역경제는 예전만 못했다. ‘태안 해변길’은 태안반도의 북쪽 끝 학암포에서 남쪽 끝 안면도 영목항까지 120㎞를 잇는 해안길이다. 지역경제를 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모두 다 조성되는 건 2013년이고, 23일 전체 구간 중 두 개 구간 25㎞의 개통식이 열린다. 새로 개통되는 구간 중 하나인 ‘노을길’을 걸었다. 드르니항에서 꽃지해변에 이르는 12㎞ 구간이다. 4~5시간은 잡아야 한다. 죽자고 목적지에 닿기 위해 걷는 게 아니므로. 솔숲과 바다를 양쪽에 끼고 걷다가 한 해변이 끝나는 곳에 서 있는 구릉성 산지를 넘어가면 또 다른 해변이 나타난다. 그렇게 크고 작은 해변 8곳을 지난다. 해질 녘, 걸어 걸어 도착한 작은 해변에 가만히 앉아 여름바람을 맞는 건 근사한 일이었다.
기점은 드르니항부터 잡았는데 여기서 다음 지점인 백사장항까지 가려면 5㎞가량 차도로 돌아가야 했다. 현재 두 항구를 잇는 260m 길이의 인도교 공사가 한창이다. 두 항은 다리만 놓으면 지척이다. 인도교는 내년 12월 완공 예정. 그 전까진 시작점을 아예 백사장항으로 정하고 걷는 게 좋겠다. 백사장항의 늘어선 횟집들 사이에 해변길로 접어드는 표지판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낮은 구릉으로 접어드는 나무 계단 길이 나온다. 산을 넘으면 백사장 해변이다. 해변은 밀물 때면 백사장 없이 물이 꽉 들어찬다. 도착했을 땐 물이 빠져 습곡 지형이 바닥까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태안의 해안은 어딘지 원초적인 기운을 품고 있다. ‘아름다움’이 극명한 남해나 에너지에 압도당하는 동해와는 다르다. 사람이 북적여도 북적이는 것 같지 않은, 비어 있는 느낌이 있다. 거대한 사구지형과 곱고 넓은 백사장이 주는 아련함. 그런 기분은 물이 빠진 뒤 젖은 백사장이 환하게 드러날 때 증폭된다.
한 모퉁이를 넘으니 바로 삼봉해변이다. 백사장이 꽤 넓게 펼쳐져 있다. 바위가 셋 있다고 해서 삼봉인데,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봉우리가 4개, 남쪽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3개란다. 하나의 바위는 이름을 갖지 못한 셈. 이름을 갖지 못해 서러운 바위 곁엔 눈물이 아지랑이가 되어 밤낮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다고 한다. 삼봉해변부터 본격적인 솔숲길이 시작된다.
이곳부터 기지포해변까지 이르는 길이 코스의 하이라이트이다. 바다 곁으로 곰솔 방풍림이 곧게 죽죽 뻗어 있다. 출발 30분쯤 지났을까 뙤약볕에 땀이 줄줄 흐른다. 바닷길과 숲길 중 원하는 길을 선택해 걸을 수 있어 나무 사이로 바다를 보며 숲길로 걸었다. 돌연 바다 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표지판을 보니 삼봉야영장이다. 곳곳에 데크가 설치돼 있고 개수 시설도 잘돼 있다. 성수기엔 캠핑족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삼봉야영장을 지나면 기지포해변이 펼쳐진다. 비슷한 해변인 것 같지만 기지포해변은 기억에 남을 만하다.
2002~2009년 훼손지역을 복원한 해안사구 지형을 따라 자연관찰로가 나 있다. 나무데크로 돼 있어 걷기도 편하고 주변으로 해당화·갯메꽃·갯그령·통보리사초 등 해안사구 식물들이 피어나 있다. 데크길이 시작되는 입구에 ‘철 지난 바닷가’ ‘해변의 여인’ ‘빈 바닷가’ 등 노래 가사가 적힌 팻말이 서 있다. 아련한 풍광 탓인지 모두 쓸쓸한 노래다. 재미삼아 송창식 ‘철 지난 바닷가’ 아래에 붙은 QR코드에 스마트폰을 대봤다. ‘철 지난 바닷가를 혼자 걷는다/ 달빛은 모래 위에 가득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러운데….’ 하와이안풍의 기타와 드럼 반주 위로 젊은 송창식의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휴대폰 노래를 들으면서 해당화와 갯메꽃이 핀 바닷가를 걷는다.
뒤돌아보니 1시간 가까이 걸어온 길이 구불구불 늘어져 있고, 멀리 삼봉해변 근처에 자욱한 안개가 그제야 보인다. 개통을 앞두고 이곳을 둘러보던 태안해안국립공원사무소 김태 탐방시설과장이 말했다. “명칭을 ‘해수욕장’에서 ‘해변’으로 모두 바꿨습니다. 단순히 여름 한철 물놀이용이라는 인식을 벗기 위해서요.” 그러고보면 바닷가에 ‘철 지난 바닷가’ 가사를 적어놓은 것도 사철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기지포해변이 끝나면 조금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산을 아무리 넘어도 도착지 ‘꽃지해변’이 나타날 줄 모른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이르다. 여기서부턴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혼자 찾고 싶은 작고 조용한 해변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두여해변은 뒤로 솔숲이 울창해 신령한 느낌을 주는데, 과연 도인들이 도를 닦던 마을이라 예전엔 ‘도여’라 불렸다고 한다. 왼쪽에 종주려라는 작은 바위섬도 하나 떠 있다. 풍광이 수려해 드라마와 광고 촬영도 종종 하는 곳이다. 두여해변을 지나 전망대, 밧개해변을 지나면 8개 해변 중 가장 작은 규모의 두에기해변이 나온다. 사람 손이 거의 닿지 않은 풍광이다. 중년 남자 한 명이 그 앞에 망연히 앉아 있다. 군부대 앞 시멘트길을 지나 방포해변에 이르니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물장난을 치고 있다. 그곳을 지나면 마지막 구릉이 나온다. 올라서니 꽃지해변의 할미·할아비 바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나온다. 고즈넉한 5시간의 걷기가 끝나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곳. 물 빠진 꽃지해변에 이른 여름을 즐기려는 피서객들이 소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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