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향기] 서울 용산 ‘따스한 채움터’ 1년 도서실·샤워실에 인문학 강좌·상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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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05.16 14:00:53
  • 조회: 855

 

 

궂은 날씨에 30분 이상 기다려 먹는 밥. 오이무침, 장아찌, 깻잎…. 특색 없는 백반. 보통 사람이었다면 까짓것 한 끼 굶고 말았을 그런 밥이 유달랐던 건 그 ‘밥’을 향한 절실함 때문이었다.
지난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노숙인 무료급식소 ‘따스한 채움터’. 노숙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은박돗자리, 누런 라면상자, 얇은 스티로폼까지 제 한 몸 누일 잠자리를 손에 꼭 쥔 채다. 익숙한 듯 계단을 오르고는 기다린다.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노숙인 한 명도 이내 곧 점잖아졌다. “빈자리 앉으시면 밥이 도착합니다.”
주린 배만큼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에 조금 뜸을 들이다 “서울역, 시청을 왔다 갔다 한다”고 답한 박만규씨(57)의 표정이 아까보다 밝다.
그는 매일 이곳에서 끼니를 해결한다고 말했다. 배식하는 1층에 자리가 날 때까지 노숙인들은 2층, 3층에서 기다렸다. ‘늦게 오면 늦게 먹는다.’ 하루 평균 900여명이 찾는 이곳에서 가장 강조되는 건 다름 아닌 ‘질서’다. 개관 초기에는 앞다퉈 밥을 먹으려는 통에 싸움도 많이 일어났지만 지금은 체계가 잡혀 있다.
‘따스한 채움터’는 지난해 5월 개관했다. 서울역 광장에서 운영하던 무료급식소를 실내로 들여온 것이다. 서울시가 20억원을 들여 건물을 짓고 서울노숙인복지시설협회에서 운영을 맡았다. 현재 25개 급식지원단체들이 시간표를 짜 돌아가면서 배식하고 있다. 개관 후 1년간 다녀간 사람만 해도 30만명. 달마다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기초생활수급이나 특별자활근로 월급이 들어오는 날에는 급식소 이용률이 20~30%나 줄어든다. 날씨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수중에 ‘돈’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컸다.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리 노숙인이 75%, 인근 쪽방촌 주민과 독거노인이 25% 정도다. 이 중 여성은 6%, 대부분이 남성이다. 세대별로는 60대가 가장 많다.
마승서 서울노숙인복지시설협회 사업팀장이 “5, 6년 전에 비해 이삼십대 젊은 친구들도 꽤나 늘었다”고 귀띔했다. 마 팀장은 “순환이 계속돼 처음 이용자들의 30%만이 지금 남아 있다”며 “집시 성향 때문에 노숙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따스한 채움터’ 3층은 지난주 작은 도서실로 탈바꿈했다. 이름하여 ‘채움도서실’.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해 에릭 홉스봄, 레비스트로스의 교양서적까지 1500여권의 책들이 한쪽 벽면에 채워져 있다. 간간이 책을 읽는 노숙인들도 눈에 띄었지만 대다수는 심드렁했다. “밥 먹으러 왔지, 이게 다 뭐여. 밥이나 빨리 줘.”
일주일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실도 있다. 막 이용시간이 끝난 후의 샤워실에서 후끈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다른 무료급식소에 비해 이곳 ‘따스한 채움터’가 두드러지는 건 바로 이러한 시설들에 있다. 목욕이나 독서뿐만 아니라 이미 한차례 이뤄진 인문학 강좌와 앞으로 예정된 상담프로그램까지 배를 채워주는 것 이상으로 마음과 정신을 채워주는 공간이 되려고 한다. 마승서 팀장은 “1%의 기득권층이 있는 반면 이런 분들 1%도 있는 것”이라며 “더 이상 잃을 것 없이 앞으로 채워나가기만 하면 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식사를 마친 노숙인들이 자원봉사자들에게 잘 먹었노라고 꾸벅 인사했다.
추적추적 빗길을 걸어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정물처럼 행인들이 스치는 풍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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