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詩心, 소설로 외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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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05.12 15:54:14
  • 조회: 12326

 

 

시인들이 소설 쓰기에 나서고 있다. 최근 인터넷 연재가 많아지면서 긴 글의 수요가 늘어난 데다 ‘시인이 쓰는 소설’이라는 화제성 요소도 있다. 시인 입장에서는 산문을 넘어 소설이란 장르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 최근 글쓰기의 경계가 무너지고 시에서 이야기성이 두드러지는 문제와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 김이듬씨는 1980년대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첫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문학동네)를 선보였다. 2001년 등단한 그는 <별 모양의 얼룩> <명령하라 팜 파탈> 등 2권의 시집을 냈으며, 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신작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을 발표했다. 세 번째 시집과 거의 동시에 나온 이번 소설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이다. 김씨는 “2002년 송재학·김민정 등 동료 시인들로부터 소설을 써보라는 말을 들은 뒤 내 멋대로 슬렁슬렁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은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정치나 이데올로기보다 개인의 복잡한 내면, 관계의 불모성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독문학을 전공하는 여대생 여울은 부모의 이혼, 남동생의 죽음으로 집을 나와 학교 선배인 지민의 자취방에서 함께 산다. 지민은 운동권 학생인데, 여울은 운동 자체보다 지민에 대한 호감 때문에 학생운동에 관심을 갖는다. 여울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에서 선균이란 남자를 알게 된다. 어느 날 지민이 자살하고, 선균이 그녀를 강간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소설에는 동성애, 우정, 남녀 간의 사랑 등 다양한 관계가 등장하지만 어느 것도 서로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결핍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책을 본 동료들은 시와 소설이 넘나드는 것으로 평가한다. 소설가 백가흠씨는 “김이듬 시인은 오래전부터 시에 소설을 써오고 있었다”고 전했고, 시인 김경주씨는 “그녀 시의 전매특허로 여겨지던 멜랑콜리적 세계와 팜 파탈적 성분이 소설에 가득하다”고 지적했다.
시인 황인숙씨도 지난해 11월부터 올 3월 중순까지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첫 장편소설 <도둑괭이 공주>를 연재했고, 이를 이달 말 단행본으로 묶어낼 계획이다. 황씨는 1984년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란 시로 등단했으며 산문집 <해방촌 고양이>를 발표할 만큼 고양이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이 소설은 서울시내 한복판에 혼자 사는 스무 살 여성 화열이 버려진 고양이들을 돌보면서 성장해가는 소소한 일상을 그렸다. 길에서 태어나 굶주리고 강제로 중성화(불임)되고 죽어가는 고양이의 모습을 통해 작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공감을 드러낸다.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시인 허수경씨도 지난달부터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장편소설 <박하>를 연재하고 있다. 현재 24회까지 진행된 이 소설은 이혼으로 혼자 남은 40대 남자가 독일로 떠났다가 오래된 노트를 발견하고, 그 노트에 나오는 입양아 출신 남자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아찾기에 나서는 이야기다.
작가는 “6년 전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던 히투샤라는 폐허도시에 갔다가 바위계곡에 핀 야생박하를 보고 작품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고고학자로 활동하는 그의 실제 경험이 담긴 이야기이기도 하다. 허씨는 지난 1월 <아틀란티스여, 잘 가라>란 성장소설을 냈으며, 90년대 후반에도 <모래도시>란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시인 강정씨도 2009~2010년 계간지 ‘자음과모음’에 <인형의 핏자국>이란 제목의 장편소설을 연재한 뒤 현재 탈고 작업을 하고 있다. <루트와 코드> <나쁜 취향> 등을 통해 산문을 잘 쓰는 시인으로 알려진 강씨는 이 소설에서 현대사회의 낯설고 부조리한 상황을 그렸다. 강씨는 시를 모티프로 해서 소설을 쓰는 새로운 형태의 작품집도 구상하고 있다. 시인이 쓰는 소설은 소설가의 소설과는 차이가 있다.
문학동네 편집자이자 시인인 김민정씨는 “소설가의 소설과 달리, 작가와 작품 사이의 거리가 없어서 자전적 요소가 매우 강하다. 구조는 촘촘하지 못하지만 번뜩이는 감수성과 빼어난 문장이 시인 소설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자음과모음 편집위원인 심진경씨는 “과거 소설의 미학을 말할 때 ‘시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제 시인들이 직접 뛰어들어 시적인 작품을 쓰고 있다”면서 “시가 길어지고 서사가 강화되는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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