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난 ‘국민가수’가 싫다, 추억·공감을 전할 뿐”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04.29 15:02:53
  • 조회: 12211

 

 

수식어가 필요없는 이름이 있다. 조용필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이름 석 자만으로도 가슴이 촉촉해진다. 저마다의 추억이 들쑤셔지고, 부드러운 허밍코러스가 이어진다. 이 땅에 조용필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얼마나 될까. 봄꽃이 천지에 가득하여 넘치던 날,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서울 예술의전당 그의 작업실 겸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여하튼 내가 드디어 방배동 ‘이웃사촌’ 조용필을 만났다. 왠지 소주 한잔하면서 인터뷰를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망할 놈의 스케줄’ 때문에 맹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 같은 동네 살면서 처음 뵙네요. 어제 동엽이 형(방송인 신동엽)이랑 소주 한잔하면서 선생님 얘기 했어요. 허정무 감독도 같은 빌라시던데요.
“아, 그래. 신동엽이 우리 앞집에 산다던데…. 허 감독님은 우리집 8층에 살아요.”
- 콘서트 준비 때문에 바쁘시죠. 전국을 다 도셔야 될 텐데요. 저도 요즘 ‘말로 하는 콘서트’ 하거든요.
“12월까지 10개 도시가 넘죠. 공연이라는 게 매년 사람을 새롭게 만난다는 의미가 있어요. 새로운 사람들에게 좀 더 새롭게 보이고 싶죠. 그래서 연출이나 무대의 감각적인 레퍼토리 배열이라든가 영상이라든가 조명, 세팅 등을 업그레이드해야 하거든요. 사실 이게 어려운 부분이에요. 오래간만이라면 여러 가지를 보여줄 수 있는데 그동안 수백, 수천번 보여줬던 거라….”
- 사실 보는 입장에서는 수백번 수천번 봐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자주 보는 팬들은 달라요. 전국을 따라다니는 팬도 있고, 예전에 예술의전당에서 14일간 하는데 매일 본 팬들도 있어요. 뭔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런 분들께 미안하죠.”
- 소록도 공연은 어떠셨어요. 혼자 슬쩍 다녀오시려다가 언론에 들통나셨던데요.
“난 처음부터 공연이 아니고 동네사람들 잔치에 그냥 재미있게 노래하고 즐긴다는 생각으로 갔어요. 작년엔 오케스트라랑 딱 두 곡만 불렀더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딱딱하고 아쉬웠죠. 이번엔 이분들을 조금 편안하게 해주면서 분위기를 좀 띄웠죠. 어떤 사람은 그러더라고요. 무슨 노래방 수준이라고(웃음). 사실 그분들은 격리된 채 매일 똑같이 살거든요. 새벽 5시30분에 식사하고, 오전 10시30분에 점심 먹고, 오후 3시30분에 저녁을 한 뒤 4시면 숙소로 들어가요. 얼마나 단조롭고 우울하시겠어요. 그래서 객석에도 나가고, 즉석에서 신청곡도 받았죠.”
그래서 조용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노래만 하러 간 게 아니라 그분들의 일상까지 파악해서 철저히 준비하는 프로정신이 오늘의 조용필을 만든 게 아닐까.
- 음악한다고 가출도 많이 하셨던데. 지금 상황으로 보면 비행청소년 아닌가요.
“그래요. 그땐 음악하는 것 자체가 불량스러운 취급을 받았어요. 심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출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악기를 사는 것도 금전적으로 힘들었지요. 돈 벌어서 전부 그쪽에다 쏟아부었으니까. 머리도 길고, 복장도 이상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요.” 하긴 ‘딴따라’라는 말이 그렇다. 조선시대 광대가 천민계급이었듯, ‘딴따라’는 한동안 광대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런 ‘딴따라’가 되기 위해 가출도 하고, 미칠 듯이 기타를 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조용필은 없었으리라.
- 원래 기타리스트로 출발하셨다가 우연한 기회에 노래하신 거죠.
“미8군 무대에 설 때 팀에서 노래하던 친구가 갑자기 군대를 갔어요. 할 수 없이 내가 했죠. 밤새도록 외우고, 연습하고. 대역으로 시작했다고 봐야죠.”
- 1968년도에 가출하셨던데요. <홍길동전> 같은 평전을 쓴다면 출가편이네요.
“그땐 집에서 워낙 반대하니까. 그때만 해도 인생을 걸고 음악을 한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젊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쌓고 싶다고 생각한 거지요. 자꾸 반대하니까 반항심 같은 게 생기면서 불쑥 집을 나왔죠. 그러다보니 굶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한 거예요.”
- 그럼, 언제 공식적 허락을 받으신 건가요.
“20대 중반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하면서 집에 들어갔어요. 그때가 집으로 들어가는 적기일 것 같아서요. 그러고 나서 부모님과 살았어요.
- 전 국민이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를 때 집으로 돌아가신 거네요. 부모님은 뭐라시던가요. 뿌듯해 하셨을 텐데요.
“아버지가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어서 표현을 잘 안 하셨어요. 그냥 눈치로 알죠. 제가 그냥 내 일만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스타일도 못되고 소극적이에요. 그저 내 일만 하고 살며 주위의 평가는 의식 안 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그것이 내 주어진 운명이지 않을까 하고 위안삼아 생각하고 있어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요.”
- 우리 가락에 감동받아 ‘득음’할 때 폭포수 밑에서 피를 토하셨다는 말도 있던데.
“그런 후문은 많은데 그건 아니고요. 좌우간 외국음악만 듣다보니 민요는 들을 기회나 관심도 없었는데 ‘한오백년’을 듣고 정말 좋은 노래다 싶었어요. 그래서 레코드점에 가서 ‘한오백년’의 음반을 전부 구입했는데 9가지 종류가 있더라고요. 거기서 뭔가 좀 찾아보자고 해서 다 들어봤죠. 국악이니까 국악기의 선율에 맞게끔 멜로디가 돼 있잖아요. 노래곡조에 양악을 얹으니 안돼요. 완전히 다른 곡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조화롭게 해볼까 고민고민한 끝에 제가 부른 ‘한오백년’이 나온 거예요. 그전에 제 목소리 자체가 너무 맑은 미성이라 외국 록을 하기가 안 좋았어요. 그래서 목소리를 한번 갈아보자는 생각을 했죠. 판소리를 들으면 완전히 허스키하니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까 싶어서 나름대로 방법을 찾다보니 조금 변했어요. 그렇게 변한 목소리로 나왔는데, 이번엔 목소리가 갔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나 자신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대로 나간 거죠.”
- 노래를 하시면서 나 노래하기 정말 잘했다, 가수가 되길 정말 잘했다 이런 생각은 해보셨나요.
“그런 생각은 별로 안 해봤고, 이건 내 운명이라는 생각은 해봤어요. 잘했다기보다 내 운명이라는, 내 길이라는 생각인 거죠.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음악 안 해도, 다른 걸 했어도 열심히 했겠다 싶어요. 성격인 것 같아요.”
- 이번 콘서트에서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가 있나요.
“음악이란 건 추억이거든요. 예를 들어 80년도에 부른 노래를 지금 부르면 듣는 이들은 이 노래를 언제 들었느냐에 따라 각자 자신이 가진 추억을 떠올리죠. 85년일 수도, 87년일 수도, 아니면 90년이 넘어서일 수도 있죠. 음악은 역사죠. 그래서 음악을 통해 그 시대를 생각하는 거죠. 내가 ‘단발머리’를 부르면 관객들은 이 노래를 들었던 그 나이로 여행을 떠나죠. 그래서 ‘메시지’보다는 ‘공감’이 어울려요. 콘서트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그렇다. 빡빡머리와 단발머리 소년과 소녀는 이제 대머리와 파마머리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조용필의 노래’ 속에서 추억하고 공감한다. 그래서 조용필은 이제 하나의 역사이자 보물이 아닐까.
- 직접 작사·작곡하신 노래는 많지 않나요. 노래를 만들 때 담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으셨을 텐데요.
“작곡은 많은데 작사까지 한 것은 많지 않아요. ‘꿈’이라는 노래는 그 가사가 메시지를 그대로 드러내죠. 꿈이 너무 허황될 필요도 없지만, 꿈이 없다면 죽은 인생이기도 하죠. 당시 지방에서 도회지로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면서 농촌엔 남자들이 없던 시기였어요. 도시로 나오는 것은 꿈을 위해서잖아요.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외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작사해서 만든 노래예요.”
- 실패한 이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네요.
“그렇죠. 꿈 이야기가 나와서인데 꿈은 어떤 목표잖아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목표와 같은 성공을 이룬 사람을 연구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 연구하면 도움이 되고 내가 가야 할 길도 보이지 않을까요.” - 꿈을 이룬 누군가를 정해놓고 보라고 하셨는데, 후배가수들,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우선 가수의 꿈을 갖고 있다면 최소한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일정 수준까지는 해야죠. 리듬 악기와 멜로디 악기 두 가지만 한다면 곡도 만들 수 있고 노래하는 데도 굉장히 도움이 되거든요. 최소한의 것은 갖춰야 한다고 봐요. 그렇게 갖추고 노래하는 것과 안 하고 노래하는 것은 많이 달라요.”
- 굳이 음악이 아니더라도 다른 쪽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은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과학이든 비즈니스든 각 분야에서 꿈이 있을 거 아녜요. 그럼 거기서 성공한 사람의 일생과 노력을 살펴보면 깨우침과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서 간 사람들의 길을 훑어보라는 거죠.”
- 요즘 젊은이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노래라고 꼽으신다면.
“없어요. 노래란 듣는 이의 느낌에 따라 다 달라요. 젊다고 해서 이런 스타일 좋아하고, 저런 스타일 안 좋아하고 이건 아니에요. 당사자가 들었을 때 ‘이건 옛날 스타일이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데 그건 사람마다 다르거든요.”
- 선생님에게는 으레 ‘가왕’이라는 호칭이 붙잖아요. 어떠세요.
“그거 좋아하지 않아요. 전 조용필, 그대로가 좋아요. 기자들한테도 그래요. 왜 자꾸 붙이냐고. 그럼 기자들은 ‘붙여야지요’라고 말해요. 전 ‘국민가수’라는 말도 무척 싫어해요.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게 너무 많아요. 과잉된 수식어와 설명들요. 국민가수, 국민여동생, 국민오빠…. 너무 유치하다고 봐요. 외국엔 그런 말 없잖아요. 그냥 붙이면 슈퍼스타,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조용필. 그와 마주앉은 짧은 시간 동안 뭔가가 얹히거나 과장되거나 가식적인 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난 그냥 노래하겠다, 뭐 그리 말들이 많으냐.’ 이렇게 꾸짖는 것 같았다. 꾸밈없는, 담백한, 원형 그대로에서 오는 차돌 같은 힘이 느껴졌다. 마치 그가 즐겨 마신다는 투명한 소주처럼…. 그래서, 조용필은 그냥 조용필이었다. 그걸로 충분하고 그게 전부였다.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