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향기] 성곽을 거니노라니 중세에 온 듯, 남도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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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04.14 14:20:40
  • 조회: 581

 

 

늦은 오후, 성문 입구에 트럭 한 대가 서 있다. 성 밖에 주차하고 성 안으로 귀가하는 삶은 어떤 걸까. 조선시대, 멀리는 삼국시대에 지어졌다는 석성의 옛 문을 매일같이 드나들며 사는 삶은 회전문이나 자동문을 드나드는 이들의 삶과 얼마나 다른 걸까. 진도 남도석성은 과거와 현재가 어지럽게 겹쳐 있는 곳이다. 석성 안엔 사람이 살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 있다. 성문에 들어서면 일순 옛날로 빠져드는 느낌이 있지만,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이곳에서 만나는 ‘옛날’은 무 자르듯 깨끗하고 반듯하게 정돈된 과거가 아닌 탓이다. 이를테면 낙안읍성과 같은 조성된 민속촌과는 다르다. 이곳은 거의 자연 그대로다. 석성이 제 역할을 했을 시절의 건물은 모두 없어졌고 지금의 집들은 모두 한말 이후 들어선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집들이다. 과거엔 민가가 190호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지금은 불과 38가구만 남았다. 성곽 속 마을은 곧 없어진다. 올해 본격적 이주와 철거를 시작해 관광지로 개발된다고 한다. 머잖아 여느 사적지처럼 ‘복원된’ 과거가 그곳에 자리할 것이다. 석성의 남문. 가장 주된 문으로 입구 앞에 둥근 옹성을 쌓았다.
남도석성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안내소 직원의 말로는 “1271년 고려 원종 때 배중손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가기 직전까지 마지막 대몽항전을 벌였던 곳”이라고 한다. 보다 더 정확하게는 1438년 조선 세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고 재축성한 수군진영이다. 왜구의 노략질에 못견딘 진도 사람들이 고려말 영암과 해남 등으로 떠났다가 이때쯤 다시 정착했다고 한다. 아예 더 멀리 가면 삼국시대부터 성이 이미 존재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여긴 땅끝에서 왜구를 막기 위한 요새지였던 셈이다. 북측 벽쪽의 산자락에 올라 석성을 품고 있는 남동마을을 바라본다. 영락없이 요새일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마을 바로 근처까지 말굽 모양의 만이 쏙 들어와 있고, 석성은 서망산과 망대산 사이 폭 들어간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 보면 절대 보이지 않을 곳이다. 거기다 땅과 땅으로 둘러싸인 둥근 바다가 마을 곁까지 들어와 있어 무척 아름답다. 성의 주된 문인 남문으로 들어섰다. 누가 진도 아니랄까봐 진돗개가 방문객을 맞는다.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똑같이 생긴 강아지 세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뛰어온다. 이 잘 생긴 섬개는 순하고 사람을 잘 따른다.
성곽을 밟으며 성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성벽에 오르니 온 집안 진돗개들이 일제히 컹컹 짖어댔다. 남, 동, 서문 세 개의 출입문이 있어 길은 세 번 끊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야 했다. 성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는 20분 정도면 된다. 둘레가 610m, 높이 5.1m의 크지 않은 성이다. 마을은 소박하고 아름답다. 여전히 오래된 돌담이 남아 있고, 돌담 사이로 고목이 뿌리를 뻗었다. 서문 안쪽에 서 있는 고목의 가지 꼭대기에는 여전히 마을 방송을 할 때 사용하는 듯한 확성기가 매달려 있다. 남동마을에서 묵은 그날 밤도 확성기를 통해 ‘마을 청년들 집합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집집마다 작은 텃밭이 있는데 새파란 마늘이 한창이다. 봄볕에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도 피었다. 마을은 그러나 번성 중인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쇠퇴해가는 쪽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지는 오래인데, 달려들어 개발을 하지도 안 하지도 못한 흔적. 곳곳에 무너져가는 폐가, 유적이 발굴된 듯한 공터가 있고 ‘농작물 경작 및 관계자 외 출입을 금지한다’는 알림판이 붙어 있다.
강순심 할머니(77)는 50여년 전 시집와 지금껏 이곳에 살고 있다. “처음 여기 시집왔을 적엔 성이 허물어진 데가 많았어요. 저 남쪽은 다시 쌓은 것이지요. 여긴 개발한다 소리한 지 오래됐어. 한 30년 전 되았나. 인자 올 6월부터 성 밖에다 집 짓고 그리로 이주시켜 준다고 하대? 아쉽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고. 여기가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아주 살기 좋은 곳인디.” 1980년대 사진을 보았다. 성은 지금보다 훨씬 거친 모습이다. 여기저기 허물어져 있고, 오래된 이끼가 끼어 있고 풀이 높이 자라 있다. 동, 서, 북쪽 벽은 그대로이고 남쪽 벽을 새로 쌓았다니 사진에 보이는 곳이 남쪽 벽인가 보다.
또 다른 할머니는 개울에서 빨래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예전에는 저 앞 개울에서 여자들이 모여서 빨래도 하고 그랬지. 남 밖에 다리 있는 데서. ‘남박다리’? 성에 문이 세 개 있잖아. 동쪽에 있고 서쪽, 남쪽에 있고. 우린 예전부터 ‘동 밖에, 서 밖에’ 그렇게 불렀거든. 그래서 남문 밖에 있다고 해서 남박다리지.” 남문으로 나가 남박다리를 보았다. 사실 이곳에 온 이유 중 하나가 이 다리다. 가느다란 실개울 위로 두 개의 오래된 다리가 있다. 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 ‘홍교’다. 주민들이 부르는 말이 남박다리이고, 공식 이름은 단홍교와 쌍홍교다. 하나는 무지개 하나짜리 단홍교, 다른 하나는 무지개 두 개짜리 쌍홍교. 단홍교는 1870년 이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위쪽의 쌍홍교는 1930년대 주민들이 세웠단다. 주변의 흔한 돌로 만든 소박한 다리인데, 특히 아치 부분은 다듬지 않은 납작한 돌을 세로로 세워 불규칙하게 돌려 쌓은 것이 독특하다. 다리를 건너보았다. 흙 위에 오래된 잔디가 푹신하다. 편안하고 정이 간다.
성 안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다시 성문 안으로 향한다. 남도석성 안에 유일하게 복원해놓은 건축물, 관아와 객사. 저 홀로 깔끔해 주변과 잘 섞이지 않는다. 그곳에 뜻밖에 백인이 서 있었다. 여긴 관광객도 별로 없는 진도의 남쪽 끝 오지다. 고개를 흔들고 다시 마을을 서성이는데, 또다시 보이는 백인 남자. 이번엔 하나가 더 늘어 둘이다. 덴마크에서 왔다는 건축가 예페와 목수 피더가 인사를 건넨다. 이들은 남도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목포와 제주를 거쳐 이곳에 왔고 곧 부산에 갈 예정이란다. 직업 때문인지 한국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예페는 “한국 건축을 좋아하는데, 이곳은 상당히 인상적”이라며 “마을이 아직 살아있어 이들의 생활상과 변천사를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고 흥미롭다”고 했다. 그리고 기자에게 “용장산성에 꼭 가보라”고 조언했다. “만개한 꽃 주위로 벌 소리만 윙윙윙 들리는 것이 정말 환상적이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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