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독립운동~민주화항쟁, 언제나 '밀양아리랑'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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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뉴시스 [http://www.newsis.com]
  • 11.02.28 15: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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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구성진 곡조의 '밀양 아리랑'은 우리나라 4대 아리랑 중 하나로 빠른 리듬으로 내어 지르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문필가 청오(靑吾) 차상찬(1887~1946)은 잡지 '별건곤(別乾坤)' 1928년 8월호 '밀양의 7대 명물, 구슬픈 밀양 아리랑'에서 "어느 지방이든지 아리랑 타령이 없는 곳이 없지만 이 밀양의 아리랑 타령은 특별히 정조가 구슬프고 남국의 정조를 잘 나타낸 것으로 지금은 전국에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고 소개했다.


1926년 음반으로 발매된 당시에도 전국적으로 불리던 '밀양 아리랑'은 시대 변화에 따라 본래 곡조에 가사만 바뀌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1920년대 중반 국내에서는 신민요라고 했지만, 해외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항일민족 운동가인 '역사의 노래'로 불렸다. 1926년 9월29일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되기 하루 전 전단 1만매가 압수당했다. 개봉도 되기 전에 주제가의 한 절인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동량의 쪽박이 왠일이냐'가 불온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대중적인 밀양아리랑은 저항성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사용됐고 중국이나 일본의 동포사회에서 민족해방운동과 함께했다.


이러한 항일성에 동화돼 밀양아리랑은 곡조의 경쾌함보다 저항성에 더 직접적인 방점을 찍게 된다. 1930년대 중국과 러시아령 지역에서 불린 '독립군 아리랑'과 1941년 임시정부 광복군 군가 '광복군 아리랑', 한유한 작 가극 '아리랑' 등이 대표적이다. '독립군 아리랑'은 영천 아리랑과 밀양아리랑 곡조로 각각 불려졌다. 전자는 1920년대말 조국을 떠나는 이들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50년대 6·25동란 때 미군은 인민군과 중공군을 구별하기 위해 아리랑을 활용했고, 중공군은 국군과 인민군의 구분을 위해 밀양아리랑 곡조의 '파르티잔 유격대 아리랑'을 불렸다. 또 1960~70년대 반전문화 속에서 영어권 지역은 아리랑을 반전음악으로 활용하기도 하는 등 밀양아리랑은 세계 속에서 불려졌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현장에서는 '신 밀양 아리랑'과 '통일 아리랑' 등으로 연주됐다. 노동가로도 기능했는데 '노가바', 즉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의 선두가 되었다. 2행 1련의 두 줄 후렴 형식에 행진곡풍의 곡조가 노가바의 전형이 되게 했다. 이처럼 시대적 상황과 함께 세계적으로 불려졌던 다양한 버전의 밀양아리랑이 처음으로 신나라레코드를 통해 음반 '영남 명물 밀양 아리랑'으로 나왔다.


마당극 배우 김종엽(64)씨와 소리꾼 신연자(70)씨 등이 창자(唱者)로 참여, 모두 9곡을 수록했다. 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연갑(57) 상임이사는 "주체화를 가진 아리랑의 저항성과 생명력을 입증하는 과정으로 아리랑의 시대적 필요성은 분명한 것"이라며 "밀양아리랑은 이같은 중요성에도 지금까지 문헌으로 다양한 버전의 가사만 전해져왔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녹음해 음반으로 발매하게 돼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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