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40년 오로지 춤 꾸준함이 내 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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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01.27 1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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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40년이란 세월을 보낼 수는 있죠. 하지만 전 1971년에 무용단을 창단해 명동예술극장에서 첫 무대를 가진 후 국내 거의 모든 무대에 섰고 소품부터 대작, 그리고 계속 신작을 발표하며 단 한순간도 쉬지 않았습니다. 꾸준함이 가장 큰 재주인 것 같아요.”


올해 ‘김복희무용단’ 창단 40주년을 맞는 김복희 한국무용협회 이사장(63)은 스스로 매우 대견스럽다는 표정이다. 40년이란 기록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200여개 사설무용단 중 가장 오랜 역사다. 이화여대를 졸업하자마자 겨우 스물셋의 나이에 스승인 육완순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차게 개인 무용단을 만들어 시작부터 파란을 일으켰다. 1971년 제1회 ‘현대무용발표회’에서 창단 작품인 <법열의 시(詩)>를 발표한 후 그는 한국 현대무용사에 여러 기념비를 세웠다.

한국적인 현대춤 만들기, 남성무용수 육성, 한국현대춤협회 발족(86년), 안무자의 작가정신을 강조한 ‘춤작가 12인전’ 창설(87년), 무용인 최초로 체육대학장 부임, 세계 최초의 현대무용대회 개최 등등 끝이 없다.
무용단을 이끄는 안무가이자 대학교수(한양대)이고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이란 묵직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그가 그토록 많은 일을 해내는 비결은 뭘까.

“항상 제 자신이 무용가란 본분과 초심을 잃지 않아서입니다. 아무리 과거가 화려해도 자리에만 연연하면 ‘옛날에 잘했던 무용가’란 평가만 듣겠죠. 하지만 저는 대학교수로 이론을 지도하면서도 공연이 있을 때는 월·수·금 연습에 빠지지 않고 춤을 춥니다. 단 한 시간도 무용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방심하면 몸으로 금방 드러나거든요.”

한 무용평론가는 “그의 춤은 인간의 연(緣)을 뿌리로 한 한국적 무용소설”이라고 평했다. 40년 춤작업은 조상들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을 춤무대로 고스란히 불러낸 탐구여행이었다는 것.

초창기엔 가야금·대금 등 한국 전통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것으로 시작, 한지·탈·부채 등을 무대로 끌어들였다. 서정주의 시 ‘춘향이 이야기’ ‘국화 옆에서’, 박경리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 등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있는 춤을 만들었다. <노틀담의 꼽추>의 이야기를 남사당패와 접목해 재구성한 <천형, 그 생명의 수레>(99년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원작에서처럼 처절한 죽음을 맞지 않고 다시 태어난다. 불교와 윤회사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새롭게 구성한 이 작품들은 해외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적인 것을 고집한 이유는 아주 단순했어요. 현대무용이 왜 서양적이어야 하느냐는 물음이죠. 현대가 서양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 것, 내 것의 상징물을 찾아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는데 힘들긴 했지만 역사·문학·음악을 깊게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영감을 얻기 위해 독서와 여행도 하지만 때론 음악도 듣지 않고 생각에만 몰두할 때도 있어요. 여러 것을 보고 소화하는 것보다 내 자신 속에서 나오는 생각, 내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는 무용가로서만이 아니라 관리자로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에 연임되어 2013년까지 대한민국의 무용계를 탄탄하게 다지고 세계로 도약하는 행사들을 준비 중이다. 국제무용콩쿠르를 만들어 수상한 남성무용수들에게 병역면제의 혜택을 주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내가 진심으로 대하면 다른 이들의 마음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김 이사장의 ‘지도자론’이다. 그의 진심이 제자들에게 전해져 현역 대학교수인 제자들이 그의 공연에 기꺼이 무용수로 참여하는 것도 그의 자랑이다.

“무용이 어렵다, 한국 무용계는 수준이 떨어진다 등등의 지적도 받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무용공연은 극장 대관도 겨우 하루이틀만 가능하고, 또 다른 공연에 비해 후원이나 지원도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우리 무용계도 대작 등을 고정레퍼토리로 장기화하는 노력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미디어들이 무용에 대한 인식과 배려가 너무 적어요. 무용 대중화는 무용수나 기관만 하는 게 아니랍니다.” 45년을 서울에서 생활했으면서도 고향 대구 사투리를 버리지 못하고, 64세의 나이에도 소녀의 눈동자를 가진 그는 천상 무용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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