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눈을 쫓아갔다. 눈에 쫓겨가는 평창 태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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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1.01.07 14: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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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였다. 대관령 선자령과 양떼목장도, 강릉 왕산면의 고랭지 오지마을 안반데기도 갈 수 없었다. 애초에 구제역으로 출입이 통제돼 포기한 곳을 포함해,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길이 태반이었다. 눈을 ○○○아갔는데, 눈 탓에 접근할 수 없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린 곳이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태기산이다. 여기도 쉽진 않다. 스노체인 없이 차바퀴가 몇 번인가 헛돌았고, 등산로에 쌓인 눈은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그래도 하늘 가까이에 이르자 지상의 복닥거림과 소음은 일거에 지워졌다. 적막 속에 눈꽃만이 깨질듯 만개해 있었다.


태기산(해발 1261m)은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둔내면과 평창군 봉평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들머리는 여러 가지가 있다. 크게 봉평 쪽 양두구미재에서 오르는 방법과 두구미재에서 오르는 방법, 혹은 태기산 서쪽의 횡성군 청일면 신대리에서 오르는 길 등이 있다. 양두구미재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양두구미재는 6번 국도상에 있는 해발 980m의 고개. 이곳은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엔 강릉으로 가는 유일한 국도였다 한다. 지금은 산이나 스키장으로 향하는 이들이 이용하는 한적한 도로가 돼 있다. 양두구미재에선 태기산 쪽으로 군사용 임도가 나 있어 차로 정상 바로 아래까지 오를 수 있다. 물론 눈이 안 왔을 때 얘기다. 차들 대부분이 1142m봉에 못미쳐 이리저리 미끄러지며 되돌아 내려갔다. 평지까지 후진으로 내려가는 차도 보였다. 중간쯤 차를 세워두고 걷기 시작했다. 목표는 평창 쪽의 양두구미재에서 시작해 산을 넘어 횡성 쪽 신대리에서 끝내는, 12㎞ 4시간짜리 코스. 30분쯤 걸어 1142m봉에 섰다. 이곳은 조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태백산맥 줄기들이 멀리 구불구불 어깨를 겯고 있다. 깊은 소실점 끝엔 운해가 깔려 있다. 해가 떠오른 직후라 여명이 남아 있었는데, 해를 바라보며 사진 찍는 이들이 몇 보였다.


계속해서 넓은 포장로를 따라 걷는다. 20분쯤 걸었을까, 이제 차도 사람도 없이 고요하다. 지나간 흔적도 없다. 두껍게 쌓인 눈밭 위로 고라니나 노루쯤으로 추정되는 짐승의 발자국이 보일 뿐이었다. 주변은 눈물 나게 희다. 곧게 뻗은 낙엽송과 잣나무도 줄기 가지 할 것 없이 온통 하얗다. 이곳엔 특히 풍력 발전소가 위치해 있어, 산 능선 위로 솟아 돌아가는 거대한 바람개비도 볼거리다. 풍력 발전기에 붙은 눈덩이들이 가끔씩 하늘에서 후두두, 떨어져 눈밭 위에 씨앗처럼 박힌다. 발전기 주변 경고판엔 ‘동절기 및 해빙기엔 발전기 본체에서 빙설이 떨어져 매우 위험하므로 접근을 금지한다’고 쓰여 있다. 잘못하면 맞을 수 있으니 조심하란 얘기다.


도로를 따라 ‘태기산 정상’이라고 쓰인 곳까지 올랐다. 태기산 정상엔 군부대가 있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그 바로 아래까지밖에 갈 수 없다. 그곳에서 다시 오른쪽 길로 더 올라 태기산 풍력발전단지 입구까지 갔다. 상고대가 절경이다. 하얗게 얼어붙은 눈꽃이 꽤 단단해 보였다. 해가 제법 떠올라 눈꽃과 소복한 눈밭이 반짝였다. 조망도 좋아서 근접한 휘닉스파크는 물론 태백산, 함백산, 청태산 등 근처 산줄기들이 모두 보인다. 이제 하산. 하산은 콘크리트 길이 아닌 좁은 등산로로 들어서는, 본격적인 오지 산행이 시작되는 길이다. 지금까진 예행연습이었던 셈. 올라온 도로를 따라 되돌아 내려가 표지판을 찾는다. ‘정상’과 ‘하산’으로 나뉜 나무 표지판이다. 표지판 밑동이 눈에 폭 파묻혀 있어 찾기가 힘들다. 이곳 갈림길에서 하산길로 방향을 틀어 드디어 진짜 ‘산속’으로 들어선다. 발밑에서 뽀득거리던 눈은 이제 무릎까지 빠진다. 바닥엔 허리 높이의 신우대(산죽)가 잔뜩 깔려 있다. 그게 신우대인 줄은 눈 밖으로 보이는 가지의 일부로 추측할 따름이다. 어느 곳이 길이고 어느 곳이 숲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이곳은 여름철에도 신우대로 뒤덮여 등산로를 분간하기 어려운 곳이라 했다. 하물며 적설량이 10㎝에 이르던 날이다.

 
20분가량 길이라 추정되는 곳을 따라 걸었다. 등산을 시작할 무렵 다른 입산로인 두구미재 입구에서 한 주민이 “대설주의보가 발효됐으니 원칙적으론 입산 금지가 되긴 했는데, 지키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냥 올라가면 돼요”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초행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일까? 발은 얼어오는데, 땀이 난다. 내리막이 시작되고 길이 좁아지기 시작했다(그런 것으로 추정한다).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내 발에 찼다. 태기산에는 진한의 마지막 임금인 태기왕이 산성을 쌓고 신라군과 싸웠다는 전설이 있다. 태기산성은 밟고 돌아가야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이곳이 등산로가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그저 적당히 나무줄기가 적어보이는 곳을 헤집어 밟는다. 같은 산속이지만 이곳은 더 적막했다.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산새소리만 화음처럼 정적을 가른다. 인적은커녕, 임도에서 보였던 짐승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태기산성 비석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눈 속에 파묻힌 모양이다. 혹은 길을 잘못 들어서 천길 낭떠러지나 길 아닌 잡목 줄기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몇 번을 미끄러지다 결국 30여분 만에 유일한 인적인 내 발자국을 따라 돌아 나온다. 눈이 그쳤으니 돌아가는 길의 발자국은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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