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길에서 만난 풍경, 시가 저절로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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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0.05.26 13: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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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길에서 시를 낳는다. 새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본다. 머리를 쪼개서 핀셋으로 숨어 있는 낱말을 꺼내거나 가슴속을 헤쳐서 아등바등 숨은 글을 훑어내는 게 아니라, 여행길에선 시가 저절로 돋는 모양이다. 계간지 ‘시인세계’가 2010년 여름호에서 스물다섯 명의 시인에게 물어봤다. ‘내 시에 영감을 준 여행, 여행지’는 뭡니까라고. 황학주 시인은 여행을 음식에 빗댔다. “여행 중의 음식은 몸을 예민하게 만든다.…여행 중에 물이나 음식에 몸이 예민해진다는 것은 몸이 시적 상태로 재배열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행지의 불편함이 재배열하는 몸의 불안 속에서 번뜩이는 시적 징후 같은 것이 자라난다. …나는 그 징후를 반긴다. 언제나. 기꺼이.”


시인마다 묘하게 끌리는 곳이 있나보다. 정호승 시인은 영주 부석사를 찾았을 때 어머니의 품속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시인은 40대 초반부터 잡지사 기자를 그만두고 부석사를 찾았다. 가톨릭 신자라 10년간은 문틈으로 부처를 봤다. 50대 초반 무량수전에 들어가 처음으로 절을 올리다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얻은 시가 ‘그리운 부석사’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 죽어버려라’


그나저나 길 위에선 시라는 것이 정말 태백산 검룡소 샘물처럼 콸콸 쏟아져 나오기도 하는 걸까. 문인수 시인은 “강원도 정선 가면 나는 시가 잘됐다. 나는 실제로 지금까지 정선 관련 시를 60여편 썼다”고 했다. 문 시인은 “내 마음속에서 촉발되는, 미역줄기처럼 올라오는 그 젖은 길은 그때 전부 정선 가는 길이었다. 정선 가는 길이야말로 내 마음속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썼다. ‘산 넘는 재가 많다. 산 넘는 길들은 그러나 산 넘어 간 것이 아니라/ 산 넘어 산속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샛길, 샛길 치며/ 또 그 끝을 끌어올리며 산에 붙는 것이다.’(문인수의 ‘정선’)


이국적이거나 새로운 풍경만이 시인들의 시심을 건드리지 않는다. 외려 낯익은 풍경을 마주하다 돌돌 말려 있던 기억에서 시를 꺼내기도 한다.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문정희의 ‘율포의 기억’) 전남 보성의 율포는 문정희 시인의 외가다. 눈물 많고 주름살 많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단다. 시인은 “율포는 그때 나에게 니르바나였다. (중략) 내생의 깊은 곳에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나이테로 자리잡은 율포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썼다.


경남 남해가 고향인 고두현 시인은 “남해안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물미해안의 절경을 그때는 별로 인식하지 못한 채 유년기를 보냈다”고 했다. 후에 문학기행으로 고향을 찾을때 “나는 내 몸을 빌려 시 한 편을 낳게 해준 물미해안의 낭창낭창한 허리를 은근하게 안아보곤 했다”는 것이다.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서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시인들이 3곳씩 꼽은 ‘잊지 못할 여행지’에는 해남이 6명(정진규·노향림·신달자·김명인·임동확·고영민)으로 가장 많았다. 남해 창선의 후박나무(이원규)나, 1980년대 4월 봄눈이 쏟아지던 강릉 바닷가(황학주)처럼 시간과 대상을 꼭 집은 시인도 있었다. 장석주 시인은 총론에서 여행을 이렇게 갈무리했다. ‘여행이란 저 바깥으로 떠남이다. 저 바깥을 향하여 나아갔다가 다시 내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을 탐사하는 게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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