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앤디 워홀의 초상 - 수줍었지만, 스타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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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0.02.03 10: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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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1986)

"나는 수줍은 성격이었지만 좀 더 내가 차지하는 영역을 넓히고 싶어 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너무 나서지 말도록 해라. 그러나 언제나 모두에게 네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언제나 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영향력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수줍은 성격이어서 주목을 받게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텔레비전을 좋아했다. 나는 텔레비전 안에서 내 자신이 가장 빛날 수 있다고 느낀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자신만의 쇼 프로그램을 가진 사람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나는 ‘낫싱 스페셜’이라는 이름의 쇼를 가지고 싶었다.”

팝 아트의 선구자인 앤디 워홀(1928~ 1987)은 생전에 어느 작가보다 많은 명성과 부를 누렸다.

 

21살에 <보그> <하퍼스 바자>의 일러스트를 그리는 상업미술가로 출발한 그는 순수미술로 전환한 뒤 1962년 ‘캠벨 수프 캔’ 그림을 전시하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 뉴욕에 ‘팩토리’란 이름의 스튜디오를 열고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해 자신의 작품을 찍어내게 했다. 워홀의 예술세계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한 평면작업뿐만 아니라 100여 편의 실험영화 제작 및 출연, <인터뷰> 잡지 발간, 언더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니코’의 음반 프로듀싱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는 믹 재거, 실베스터 스탤론, 리처드 기어 등 수많은 스타와 사귀고 하룻밤에 여섯 군데를 돌 만큼 파티를 즐겼다. 때로는 주변 인물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밸러리 솔래너스란 여배우는 ‘그가 내 인생을 너무 많이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로 워홀을 저격했고, 영화 <팩토리 걸>의 주인공인 에디 세즈위크는 백만장자의 상속녀로서 19살의 하버드대 학생일 때 워홀을 만난 뒤 40여 편의 워홀 영화에 출연하는 등 팩토리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워홀에게 버림받고 스물여덟에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다.

 

■ 어린시절 열등감 지독한 자의식 키워
워홀의 팝 아트는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문 현대미술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워홀의 대표작은 워홀 자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에고는 강하고 개성적이었다. 숨고 싶은 욕망과 드러내고 싶은 욕망 이 두 가지 사이의 긴장이 워홀이란 작가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매체에 의존해 작품과 자아를 재구성했다. 1950년대 후반에 텔레비전과의 ‘연애’를 시작한 그는 침실에 텔레비전 4대를 놓고 살았다. 1964년 테이프 레코더를 산 뒤 10년 동안 자신의 독백 및 지인들과의 대화를 4000개 녹음했다. 이를 놓고 그는 “내 아내 테이프 레코더와 나는 10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 두개골 (1976)

1976년 11월 24일부터 숨지기 직전인 1987년 2월 17일까지는 팩토리의 동료인 팻 해킷에게 매일 오전 9시 반 전화로 전날의 일과를 불러서 원고지 6900쪽 분량을 기록하게 했다. 녹음을 풀어낸 내용은 <앤디 워홀의 철학>이란 책, 전화메모를 정리한 내용은 <앤디 워홀의 일기>란 책으로 각각 출간됐다. 가장 내밀한 일상과 생각까지 기계와 타자의 편집에 의해 걸러지고 변형 또는 왜곡되게 했다.

 

그의 지독한 자의식은 어린 시절의 가난과 외모에 대한 열등감, 예민한 감수성에서 비롯됐다. 앤드루 워홀라(본명)는 피츠버그의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건축노동자인 아버지 온드레이와 어머니 줄리아 사이에 태어났다. 9살 때 희귀병인 무도병에 걸려 집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미술·만화·영화 등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4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어머니 줄리아와의 관계는 더욱 밀착된다. 줄리아는 아들에게 카메라와 필름 프로젝터를 사주고 스케치와 색칠에 대해 칭찬했다. 카네기공대에서 상업미술을 전공한 그는 뉴욕으로 가 디자이너로 자리잡은 뒤 29세 때 코 성형수술을 받았다. 그는 “이전에 나는 내 코 모양이 정말 싫었다. 코가 언제나 빨갰고, 그래서 샌드페이퍼로 닦아 내고 싶었다. 가족조차 나를 ‘앤디 빨간코 워홀라’라고 불렀다”(<철학>)고 회상했다. 또 말년의 그는 “오, 요즘 내 모습은 너무 흉하다. 주름 제거 수술을 받아야겠다. 화장은 하나도 먹지 않고, 볼과 목살은 축 처졌다. 목은 터틀넥 스웨터로도 숨길 수가 없다”(<일기>)라고 탄식했다.

 

■ 유명인사의 이미지 다시 탄생시켜
작가로서 워홀의 출발점은 미국의 대량생산과 대중문화다. 대통령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건달이나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을 더 낸다고 더 좋은 콜라를 마실 수 있는 건 아니다. 돈을 더 내면 양이 많아질 뿐 질은 좋아지지 않는다. 브릴로 비누와 하인즈 케첩 상자, 캠벨 수프 캔을 현대의 정물로 삼아서 캔버스에 그린 것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현재 거래 가격이 개당 250억원인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일반 시장에 쌓여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에는 소재가 나무와 종이라는 차이밖에 없다. 브릴로 상자는 워홀이 그림으로써 미술작품이 됐다. 이런 점에서 워홀은 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전시한 마르셀 뒤샹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뒤샹이 예술이라는 개념에 담긴 전시대의 맥락을 존중한 반면에 워홀은 예술과 상품의 경계를 해체하는 데까지 나갔다.

 

자화상(1978)

자화상 (1966~1967)

자화상 (1963~1964)

코를 파고 있는 소년 상반신 (1948~1949)

워홀이 무엇보다 끌린 것은 대중매체에 나타난 스타의 이미지다. 워홀은 19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인 재클린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재현했다. 존 레넌, 주디 갤런드, 존 웨인, 믹 재거, 마이클 잭슨, 무하마드 알리, 매릴 스트립, 클린트 이스트우드, 발렌티노, 다이애나 빈, 마오쩌둥, 레닌, 아인슈타인, 카프카, 베토벤 등 그의 ‘팩토리’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유명인사는 거의 없을 정도다. 감춤과 드러냄이라는 워홀식 사고의 양면성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1963년에 처음 주문받은 초상화는 초기 팝아트의 대표적인 컬렉터인 로버트 스컬의 아내인 에셀의 것이었다.

 

워홀은 그녀의 다양한 표정과 포즈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면서 마치 신문에서 잘못 인쇄된 부분처럼 진하거나 흐리거나 아예 안보이게 만들었고, 이것이 신선한 효과를 자아냈다. 워홀의 초상화는 대중에게 익숙하게 각인된 이미지에다 여러 가지 색과 윤곽선을 덧입혀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데 후기로 가면서 기법의 갱신 없이 주문 제작한 초상화는 팩토리의 주요 수입원이 됐다. 그의 골수팬이던 평론가들조차 “벼락부자들, 남미 독재자의 부인들, 아는 사람들로 좌석을 채운 B급 TV 프로그램이나 라스베이거스 쇼와 유사하다”고 독설을 퍼부을 정도였다.

 

워홀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자화상이다. 그는 여러 시기에 걸친 자화상을 남겼다.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의 일상을 테이프 레코더나 전화통화로 드러냈듯이 스스로의 이미지 역시 감추고 연출하고 왜곡시켰다. 워홀의 초기 자화상 가운데 하나는 ‘코를 파고 있는 소년’이다. 카네기공대 시절 피츠버그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다가 탈락한 이 작업은 종이에 흑연 드로잉으로, 지저분하게 왼쪽 코를 후비는 못생긴 소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코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 팝 아트 작가로 부각되기 시작한 1960년대 초반의 그는 할리우드 스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내린 신비로운 이미지를 연출했다.

 

1970년대 자화상 속의 그는 입에 손가락을 대고 잠시 생각에 잠긴 할리우드 스타의 전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얼굴이 색면으로 칠해진 반면에 왼쪽 얼굴은 강렬한 명암 대비 속에 그림자로 완전히 지워져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또 다른 자화상에서 워홀은 초점을 달리한 옆모습을 반복적으로 배치하고, 최소한의 얼굴 윤곽 표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모두 검은색으로 처리했다. 삼중으로 겹쳐진 이미지와 화면을 뒤덮은 검은색은 인물이 누구인지조차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마지막 자화상은 담낭수술 이후 심장부정맥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6년에 제작된 것이다. 머리가 사방으로 뻗친 은색의 가발을 쓰고 찍은 사진을 이용한 이 작품에서 그는 해골처럼 수척해진 얼굴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화면 중간에 떠 있는 워홀의 얼굴은 유령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수세기동안 예술에서 자주 언급된 주제인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형상화한 것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과 유한한 인생을 상징한다.

 

워홀은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긴 1970년대에 이미 해골 작업을 선보였다. 워홀의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 밸러리 솔래너스가 1968년 그를 저격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거의 죽을 뻔했으나 5시간에 가까운 수술을 통해 소생됐다. 이 사건은 워홀의 삶과 예술관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갑작스럽게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공포와 싸우면서 워홀은 ‘두개골’ 시리즈를 구상했다. 1976년 작업실 조수인 로니 커트론에게 프랑스 파리의 고물상에서 해골을 구입하게 한 뒤 사진을 찍고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제작한다. 화려한 색감을 지닌 그의 해골은 죽음과 공포의 이미지에다 아름다움과 매혹을 결합시킨다. 현대미술의 악동이라고 불리는 데미언 허스트는 워홀의 ‘두개골’에서 해골에 8600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 600개 다양한 유품상자 남겨
워홀은 수많은 작품과 함께 ‘타임캡슐’이라고 불린 600개의 유품상자를 남겼다. 종이 한 장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아키비스트였던 그는 편지·초대장·잡지·책·신문클립 등 자기시대와 자기자신을 증언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남겼다. 전문가들에 의해 조금씩 ‘발굴’되기 시작한 이 상자에서는 워홀이 유명인사의 신발을 수집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의 부인인 케이가 보낸 게이블의 ‘스펙테이터’ 브랜드 맞춤구두가 나오기도 했다. 또 얼마 전에는 재클린 케네디의 나체 뒷모습이 나와서 워홀과 재클린의 관계에 대한 억측이 나돌기도 했으나 워홀과 절친했던 재키(재클린의 애칭)가 우정의 표시로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을 선물한 것으로 밝혀졌다. “살이 30㎏이나 빠진 스탤론이 귀엽고 섹시하다”는 기록을 일기장에 남긴 워홀은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앤디 워홀의 20주기였던 2007년 리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데 이어 지금까지의 워홀 전시 가운데 국내 최대 규모라는 ‘시대를 초월한 팝 아트의 제왕 -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전이 오는 4월 4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지형을 바꿔 놓은 팝 아트라는 예술사적 관점뿐만 아니라 워홀이라는 괴팍한 천재의 삶으로부터 작품을 감상한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싸우는 서로 다른 경향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재능이 발현되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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