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끝내 자유로울 수 없는 ‘과거’라는 형벌…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10.01.25 13:35:15
  • 조회: 12193


ㆍ환상과 현실 넘나드는 앙골라 소설… 국내 첫 소개

 

▲ 기억을 파는 남자…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 | 중앙북스

이글거리는 태양, 키 큰 야자수 나무가 있는 정원과 아보카도 나무가 우거진 뒷마당이 있는 이국적인 자택. 그곳에 백피증을 앓고 있는 흑인 펠릭스 벤투라와 그의 애완 도마뱀 에울랄리우가 있다. 그에게 어느날 콧수염을 기른 낯선 남자가 찾아온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과거다. 펠릭스 벤투라는 자신의 정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이 사내가 ‘주제 부슈만’이라는 새로운 인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남자는 펠릭스 벤투라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스스로 완벽한 ‘주제 부슈만’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 주변에 몇몇 인물들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사진 작가 안젤라 루시아, 국가안전부의 전직 요원이었지만 거지로 살고 있는 에드문두 바라타 두스 헤이스….

 

백피증을 가진 흑인 남자와 도마뱀의 기묘한 조합, 과거를 만들어내는 남자와 조작된 과거를 현실로 만들어내려는 남자….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둘러싼 화자이자 관찰자는 도마뱀 에울랄리우다. 그는 심지어 인간이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제 부슈만’의 정체가 드러난다. 서로 상관없이 흩어져 있던 인물들과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50·사진)의 <기억을 파는 남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앙골라의 소설이다. 나라도, 작가의 이름도 우리에게는 낯설다. 앙골라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한때 소련의 지원을 받았으나 1990년대 들어 극심한 내전과 가난과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소설은 앙골라를 닮았다.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야기는 마르케스나 보르헤스와 같은 중남미 문학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닮았으며, 조작된 기억과 진실,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는 소설의 기저에는 앙골라의 인종차별, 불안한 정치 현실, 내전과 같은 문제가 깔려있다. 펠릭스 벤투라는 백피증을 앓고 있는 흑인이다. 백인에게 “나보다 더 하얗다”는 말을 듣는 그는 백인과 흑인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다. 그런 그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과거와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문학의 보다 진보된 형태”라며 “그들에게 생명과 삶을 주고 그들을 현실이라는 공간에 내던지고 있다”고 말한다.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펠릭스 벤투라가 만들어 준 과거대로 살며 철저히 ‘주제 부슈만’이 되고자 하지만 결국 그가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가 과거에 받았던 정치적 탄압과 그로 인한 가족의 죽음과 상실로 인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임이 드러난다.

 

어떤 이들은 그럴싸한 과거 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얻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가령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제품부 장관이 그러한데, 그는 그저 돈을 ○○○아 움직였던 그의 과거를 반체제 투사였던 정의로운 과거로 포장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과거는 너무 끔찍한 것이어서 쉽사리 가리고 은폐할 수가 없다. 새로운 존재가 되려고 했던 이들의 시도는 결국 진짜 과거와 기억에 종속되며, 과거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모든 것에 붙여진 이름은 운명처럼 자신에게 부과된 하나의 형벌이나 선고가 될 수 있다 … 반대로 어떤 것들은 마치 가면처럼 자신을 숨기거나 속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은 그 어떤 힘도 갖고 있지 못해 이렇게 저렇게 순응하며 살아갈 뿐이다”라는 에울랄리우의 독백처럼. 이광윤 옮김. 1만1000원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