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진짜 로마는 잊혀진 도시에 숨어 있었다…유적지 오스티아 안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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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11.13 13: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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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지금의 로마가 로마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로마의 모습은 고대 로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계속되는 훈족과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AD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로마는 한동안 버려지다시피했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로마는 다시 과거의 영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문제는 문화재 보호의 개념조차 없었던 당시 로마인들은 고대 건축물을 채석장 정도로 여겨 대리석과 조각상을 마구 떼어다 썼다. 안타깝게도 고대 로마의 신전과 건축물은 다시 돌덩어리가 되어 사라졌다.

 

자 그럼, 과거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이탈리아 정부 장학생으로 로마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뒤 로마에 대한 책을 여러권 냈던 정태남씨는 폼페이와 오스티아 안티카를 꼽았다. AD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사라져버린 폼페이는 비극적인 역사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만 오스티아는 사실 생소하다. 그래도 오스티아 안티카는 고대 로마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적이다. 로마에서 기차로 40분 거리다. 로마가 서울이라면 오스티아 안티카는 인천쯤 된다. 오스티아는 천혜의 항구 도시로 소금이 유명했다. 정태남씨는 “고대에 소금은 곧 돈이었다”며 “기원전 7세기 중반 안쿠스 마르티우스왕이 오스티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로마는 강성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폼페이우스가 BC68년 이곳까지 침범해 온 해적을 소탕하기도 했다.

 

오스티아 안티카 입구의 오솔길은 넓적한 박석이 깔려있었다. 이 길이 고대 로마시대의 도로 비아 오스티엔세이다. 고대 로마의 밤은 시끄러웠다. 전성기 인구가 100만명이나 됐던 로마인을 먹여 살리려니 엄청난 양의 곡식이 필요했다. 해서 이런 길을 따라 마차 수백대가 밤새 덜거덕 소리를 내며 오가곤 했다. 마차 소음 때문에 위장병이 생긴 로마인도 있었단다. 도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퀴 자국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다. 입구에는 잘 생긴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희한하게도 우산과 버섯처럼 가지가 퍼졌다. 폼페이 화산 폭발 당시를 기록한 문서에는 구름이 소나무처럼 피어올랐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런 소나무를 보지 못한 외국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게 분명하다. 한국인이라면 버섯 구름이 피었다고 했을 것이다.

 

유적지 초입은 묘지다.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 석관도 길에 널려 있고, 유골을 놓아둔 것으로 추정되는 자그마한 건축물도 많다. 로마인들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영역을 구분했다. 기독교의 전래 이후에야 성당 바닥에 묻을 수 있었다. 조그마한 다리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도시 유적이다. 로마시대엔 입구부터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고 한다. 마차가 일종의 택시. 마차 정류장 바로 앞에는 공중목욕탕 터다. 2000년 전의 유적인데도 아직 타일이 깔려 있다. 타일에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로마인들의 목욕 문화는 유명하다.

 

보통사람들이 다니는 공중탕도 있었고, 지금으로 치면 조합에서 운영하는 회원제 목욕탕도 있다. 정태남씨는 “흔히 우리만 온돌을 썼다고 알고 있는데 고대 로마인들도 온돌을 이용했다. 로마인들은 바닥뿐 아니라 벽도 온돌을 썼다”고 했다. 가이드 피올라는 올리브 오일을 몸에 바르고 긁어서 때를 벗기는 목욕문화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태리 타월은 이런 역사와 무관하다. 그럼, 당시 인기 있던 로마인의 모습은? 공화정 시대엔 생머리에 땀냄새 나는 남자가 인기가 있었다. 왜? 공화정시대의 미덕은 근검·절약이다. 사치를 싫어했다. 해서 성실하게 땀흘려 일하는 남자가 인기 높았다. 황제가 다스리던 제정시대로 넘어가면 미남상도 바뀐다. 조각상에도 퍼머머리가 나타난다. 돈 벌면 ‘폼 내고’ 싶은 법. 로마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실도 수세식이었다. 대리석에 구멍을 파고 물이 흐르게 했는데 서로 이야기하면서 용변을 봤다는 가이드 설명에 문짝 없는 중국 시골화장실이 떠올랐다.

 

로마인들은 아파트에 살았다. 당시 주택은 크게 개인 주택인 도무스와 공동주택 아파트, 교외별장격인 빌라로 나눈다. 빌라가 여럿 모인 곳이 빌라주(이게 마을을 뜻하는 빌리지의 어원이다). 도무스에 사는 사람은 상류층으로 극히 적었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공동주택에서 생활했다. 1층은 가게가 있었고 2층부터 주택이다. 높이 제한이 있어서 4층 이상은 짓지 못했다. 정씨는 “로마의 공공건축은 아주 잘 지었는데 공동주택은 날림공사가 많았다”고 한다. 지진과 해일에 속수무책이었다. 공공주택의 가게터에 들어갔더니 와인을 저장해 놓은 곳으로 보이는 항아리가 남아 있었다. 음식도 주문할 수 있었는데 글 대신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문맹자가 많을 수밖에 없던 시절이니 그림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아케이드에도 바닥에 타일이 깔려 있고 그림으로 모양을 냈는데 어물전은 생선 그림이, 해양과 관련된 상점에는 배나 바다의 신 넵투누스를 새긴 타일이 깔려있다.

 

로마를 얘기할 때 원형극장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 원형극장은 그리스 원형극장과는 달랐다. 피올라는 로마의 극장은 아치형의 지붕이 있는데 그리스 극장은 없다고 한다. 아치형의 지붕 모습은 후대에 와서 고딕양식에 응용된다. 도심 한가운데에는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와 그의 아내 유노, 지혜의 신 미네르바를 모신 신전도 있었는데 대리석은 다 떼내어 버리고 벽돌벽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규모는 웅장했다. 로마에선 나중에 황제도 신이 된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를 신처럼 격상시켰다. 그 역시 카이사르의 양자이니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오스티아 안티카는 AD 2세기 이후 다른 항구가 개발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다가 로마제국 멸망 후 잊혀진 도시가 됐다. 800년 영화를 누렸다. 로마를 한두 번 보고난 뒤 조금 더 알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오스티아 안티카가 좋다. 로마제국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돋보기다.

 

▲여행길잡이

* 피라미데역에서 오스티아 안티카역까지 전철이 다닌다. 1유로 정도다. 오스티아 안티카 입장료는 6.5유로. 한나절을 돌아봐야 할 정도로 넓다. 이탈리아 관광청 www.enit.or.kr 라지오주 www.atlazio.it

 

* 프라스카티 지역의 카차니 식당은 이탈리아 100대 전통식당에 드는 집이다. 1922년부터 3대째 가업을 물려받았다. 이 식당을 찾았던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의 사진도 걸려 있다. 90년 30명이 넘는 일본 요리사들이 이탈리아 요리를 배워간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 음식의 특징은 로마와 가까워 고급음식과 서민음식이 공존한다는 것. 이 집 주방장이 꼽는 대표 요리는 플랑 알리 디아골라라는 닭요리. 음식이 나오는 데 4시간 걸려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www.cacciani.it 06.9401991

 

* 로마 근교의 피우지는 교황들도 온천을 했던 온천도시. 작은 도시에 150개의 온천호텔이 몰려 있다. www.albergoambasciatori.it 언덕배기의 중세마을도 아름답다. 중세에 지어진 집에서 맛보는 전통음식도 별미. www.ristorantefiuggi.it

 

* 로마는 라치오 주의 주도다. 로마 말고도 주변에 아름다운 유적이 많다. 브라차노 성은 톰 크루즈가 피로연을 했다는 중세의 성이다. 월요일은 휴무이며 하루 3차례 가이드투어를 할 수 있다. www.odescalchi.it

 

* 체르베테리 네크로폴리스는 에트루리아 유적이다. 로마인들이 점령한 뒤 에트루리아의 흔적을 밀어버렸지만 능은 남았다. 가야나 신라의 왕릉을 떠올리는 능이 무려 1000기나 흩어져 있다. 겉은 흙이지만 속은 돌을 깨서 만들었다. www.etruiaguide.it www.provacanz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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