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텅빈 그 자리, 그대는 如如하신가…원주 법천사·거돈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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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10.30 09:4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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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누의 책 한 권 들고 강원도 원주 폐사지에 가봤다. 무너진 절터에 뭐 대단한 게 있어서? 그런 것은 없다. 산사는 수백년을 버텨온 절집과 금박 입힌 부처라도 있고, 운이 좋으면 예의바른 보살이 점심공양을 권하기도 하지만 절터는 그저 절터일 뿐이다. 그래도 절터에 가면 찡하다. 왜 그럴까, 향적 스님은 이지누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의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원주 거돈사터. 절터에선 상상의 즐거움이 있다. 텅 빈 법당터에서 불상을 떠올리며 1000년 전의 영화를 그려볼 수 있다. ‘공적(空寂) 앞에서 서면 누구나 텅 빈 충만을 느낀다. 그래서 흔적만 남은 산문들의 빈터에서 선의 진수를 맛본다. 선의 요묘한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선사들은 그래서 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고 일갈할 뿐이다.’

 

절터는 휑하다. 휑한데 끌린다. 천년고찰에 가면 화려한 단청도 법당도 건성으로 보지만, 폐사지에선 탑이라도 남아 있으면 감사하다. 요리 보고 조리 본다. 연화 무늬 받침돌만 보고도 온갖 상상을 다 해본다. “저 탑은 어느 석공이 만들었을까” “수백년 고찰도 흥망이 있고, 성쇠가 있구나….” 뭐, 이런 상념이다. 원주시 부론면에 산 하나를 두고 법천사지와 거돈사지가 있다. 어렵게 길을 물어 법천사지에 갔더니 벌써 수년째 복원작업 중이라 어수선했다. 절터였음직한 넓은 마당엔 파란 비닐을 덮어 놓았고, 석공의 돌 쪼는 소리가 요란했다. 발길을 접을까 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탑이라도 보고 가자는 생각에 오솔길을 올랐다. 풀 뜯던 흑염소는 눈치를 보다가 홱 달아나버렸다.

 

참, 잘 왔다 싶었다. 법당터는 흔적이 또렷했고, 부서진 탑 옆에 부처를 새긴 돌판을 비스듬히 걸쳐놓았다. 귀퉁이에는 꽤 큰 화려한 탑비가 서 있었는데 국보 59호인 지광국사현묘탑비다. 이지누는 ‘빼어난 석조유무들이 아름다운 것은 비단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섬세함뿐만은 아니다. 그것은 몸과 정신이 함께 다스려진 사람의 손이 일구어 놓은 또하나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라고 썼다. 석공의 솜씨를 두고, 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요즘 세상과 비교하며 ‘언플러그드 위대함’이라고 했다. 돌을 밀가루 반죽 만지듯 깎아놓은 석공의 솜씨는 놀라웠다. 하지만 안목이 없어 예술사적 가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예뻤다. 하기야 이지누도 ‘절터에서는 때로 지식이나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도 부처님은 용서하실 것이다. 선사들의 말씀 한 마디나 경전 몇 줄보다 절터에서 볼 수 있는 감동이 뭇사람에게는 더욱 큰 것이지 않겠는가. 그 감동은 깊은 느낌으로 남을 테니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거돈사터와 산 하나를 두고 있는 법천사터.
절터는 컸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아랫마을 논밭까지도 다 절터였다. 틀림없이 보통 절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심산골에도 절이 들어앉아 있긴 하지만 부론면은 심심산골이 아니었다. 교통요충지다. 원주 부론은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지역이다. 물길은 남한강을 따라 한반도의 배꼽 충주로 이어진다. 고대부터 남북통로였고, 고려 때는 전국의 12조창 중 하나인 흥원창도 있었다. 그렇다면 신라 말 세워졌다는 법천사와 거돈사는 저잣거리에서 딱 한 발 물러선 곳에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름난 선비들도 절 주변에 많이 살았던 모양이다. 이지누의 책에는 “서거정과 한명회의 스승 유방선, 허균과 딸 허난설헌을 가르친 이달, 정조 때 문장가 정범조도 (법천사 인근에) 살았다”고 했다. 허균은 스승의 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을 폐사지에서 탑비만 해가 저물도록 어루만지다 왔다고 한다.

 

고갯길을 넘어 거돈사에 가봤다. 거돈사까지는 차로 6㎞쯤 된다. 절터가 어딨을까 궁금해질 즈음에 왼쪽에 석축이 나타났는데 계단 위로 올라서니 거돈사지가 드러났다. 잘 다듬어진 절터는 탑 하나, 금당터만 오롯하게 남아 있었다. 관리를 맡은 마을 노인은 수령이 1000년이라는 노거수 그늘에 앉아 있었다. 부지런한 노인은 풀까지 깨끗하게 깎아놓았다.

 

절터는 고요했고 바람만 살랑거렸다. 이지누는 폐사지에 부는 바람을 두고 “어느 절집의 풍경소리가 이만할까”라고 썼다. 사실 사람은 눈(目)에 의지해 살게 마련이다. 눈을 감고 10분만 그늘에 앉아 있으면 더듬이들이 일어난다. 촉각세포는 촉각세포대로 바람의 결을 읽으려 하고, 청각세포는 소리의 두께를 파악해낸다. 풀냄새, 꽃냄새도 놓치지 않는다. 거돈사도 큰 절이었다. 아득하게 넓은 터가 그 규모를 말하고 있었다. 탑 뒤로는 부처를 모셨음직한 좌대가 있었는데, 많이 상해서 좌대 같지 않고 그저 바윗덩어리 같아 보였다.

 

“그거 불에 타서 돌이 튀어 그랬다네요. 언제인지는 몰라. 아주 옛날이겠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 말쯤 절이 세워졌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으로 보인다. 상상해보자. 왜군이 수륙교통의 요충지를 먼저 장악하려 했음은 뻔하다. 북상하다 법천사와 거돈사에 들렀을 것이다. 사람 귀까지 베어간 왜구들이었으니 금부처에 두 손을 모으기는커녕 금박을 긁어냈을 거고, 비구와 비구니를 능욕했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들고 일어선 승병에 곤혹을 치렀던 왜군은 절에 불까지 질러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수난은 임진왜란 때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일제강점기엔 거돈사의 원공국사승묘탑은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해방 후 반환됐다. 탑비는 절터로 오지 못하고 경복궁에 있다가 용산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법천사의 지광국사현묘탑도 마찬가지. 1912년 일본인들이 반출했다가 1915년 반환됐다. 결국 왜구에 의해 폐사가 됐고, 일본인 때문에 탑과 비가 서로 생이별하게 됐다.

 

불가에 “여여(如如) 하신가?”란 인사말이 있다. 여여란 한결같고 변함없다는 뜻이다. 나무 부처가 잿더미로 변하고, 쇠 부처가 녹아내린 절터에 가면 바람으로 화한 부처가 나에게 묻는 것 같다. 그대는 여여하신가?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부처가 나를 보고 계신 건가. 내가 부처를 찾고 있는 건가.


■ 여행길잡이

*서울에서 가자면 영동고속도로 원주 문막IC까지 갈 필요 없이 여주IC에서 빠지는 것이 낫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37번 국도를 타고 점동사거리까지 간다. 사거리에서 좌회전, 84번 도로와 335번 도로를 타고 단암삼거리까지 진행한다. 단암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부론면. 부론면 소재지에서 문막 방향으로 500m 가다 우회전하면 법천사지 길이다. 이정표를 보고 따라가면 된다. 법천사지에서 6㎞ 정도 더 들어가면 거론마을 쪽에 거돈사지가 있다.

 

*호미출판사에서 나온 이지누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은 폐사지에 관심이 많은 답사객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이지누는 사진가로 시작했지만 글도 좋다. 사찰문화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다. 강원도와 경상도의 절터를 수록한 <절터톺아보기 시리즈> 1권이다. 2만4000원.

 

*문막IC에서 가까운 흥법사지도 원주에 있는 폐사지다. 간현국민관광지를 지나 흥법사지 안내판을 보고, 김제남신도비 쪽으로 좌회전해 논길을 따라간다. 큰 길을 만나면 건너편 논길로 직진해서 다시 들어간다. 거북받침돌만 남은 진공대사 탑비와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절이 있던 자리에 도천서원이 들어섰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서원도 사라졌다.

 

*폐사지 근처에는 식당이 없다. 여주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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