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고집스럽게 지켜온 트로트 가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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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09.07 11: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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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균 할아버지의 여덟째 아들 최명진씨는 이번에 수십 년 동안 가슴 한구석에서 키워왔던 소중한 꿈을 이뤘다. 바로 정식 앨범을 내고 트로트 가수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것. 아버지께 바치는 노래인 ‘아버지’라는 곡으로 이제 막 신나게 활동 중이다. 성악과 출신답게 깊고 시원한 목소리에 절절한 진심이 더해져 심금을 울리는 ‘진한’ 곡이 탄생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성악을 시작해서 대학에서도 성악을 전공했어요. 각종 대회에서 굵직한 상도 많이 받았고 대학교 4학년 때는 개인 독창회를 열 정도로 촉망받는 성악가였어요. 졸업 후에 유학 권유를 많이 받았는데, 집안 형편상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겠더라고요. 지도 교수님도, 형들도 다들 아깝다고 최대한 도와주고자 하셨는데 사정 뻔히 알면서 음악을 계속할 수가 없었어요. 사실 어릴 때부터 성악을 하면서도 트로트를 워낙 좋아했고 트로트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쪽 길로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학창 시절 “성악 하는 놈이 만날 트로트만 부른다”며 선생님께 매를 맞기도 한 그였다. 가방에 「트로트대백과」라는 책을 넣어 다니며 페이지가 구멍이 날 정도로 볼펜으로 표시를 해가며 노래를 외우기도 했었다. 결국, 오페라 무대 대신 정통 트로트로 인생의 항로를 튼 그는 트로트 가수가 되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앨범을 내려면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 딱 3일째 되던 날 짐을 싸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밤낮없이 일하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한 신발 회사 입사시험에 합격해 일을 시작한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곧 불어닥친 IMF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회사를 옮겨 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았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트로트와 인연이 닿게 됐다.

 

“전공을 살려 구에서 운영하는 합창단에 들어가게 됐어요.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트로트계에서 유명한 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그 앞에서 노래를 불렀더니 ‘앨범 안 내고 뭐 하냐’며 반기시더라고요. 그때 저한테 곡도 주셨어요. 사정상 앨범은 내지 못했지만 본격적으로 발동이 걸리게 된 거죠.” 한동안은 소위 말하는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어서 즐겁기는 했지만 술 취한 손님들이 던지는 땅콩이며 마른안주를 얼굴에 맞아가며 일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들었다. 게다가 사장은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돈을 안 주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몇 번 만나지 않았을 때부터 아내의 고운 심성과 됨됨이에 반해 적극적으로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첫눈에 반했어요.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착하기도 했고, 그리고 예뻤어요(웃음). 아내 별명이 한때 ‘이효리’였다니까요. 꼭 결혼해야겠다 싶어서 세 번째 만났을 때 무작정 처갓집을 찾아갔죠. 그 때 밤무대에서 노래할 때라 올백 머리에 밤무대 의상을 입고 갔으니 장모님께서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어디서 건달 놈을 데려왔냐’며 ‘절대 안 된다’고 엄청 반대하셨죠.” 하지만 근성하면 또 그 아니겠는가.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고자, 그리고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목표와 계획을 갖고 있는지를 알리고자 끈질기게 설득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정성에 감화된 장모님의 허락으로 정식 교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든든한 가장이 되려면 밤무대 일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동대문시장에 가서 옷을 떼다가 동부시장 다리 위에서 노점을 시작했죠. 제가 한 번 하면 최선을 다해서 끝장을 보는 편이거든요. 성악과 다닐 때 오페라 ‘춘희’의 ‘알프레도’를 맡아 노래하던 제가 길 한복판에서 박수를 치면서 ‘한 장에 5천원, 두 장에 만원’을 종일 외쳤어요. 한번은 누나와 형이 서울에 올라와 그런 제 모습을 보고 펑펑 우시더라고요.”

 

능력 있는 가장이 되어 사랑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고, 가슴속에 넣어두었던 트로트 가수라는 꿈을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었기에 여유를 부릴 겨를이 없었다. 평생을 약속한 아내와는 적금통장을 만들어 둘이서 한 달에 100만원씩 넣기로 했다. 최명진씨만큼 ‘독하게’ 알뜰한 아내가 월급을 받아 딱 10만원 정도만 쓰고 매달 75만원을 그에게 건넸다. 남자로서 오기가 발동한 그는 통장을 하나 더 만들어 한 달에 100만원가량을 저축했다. 그러기 위해서 바람이 부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일을 했다.

 

“장사를 그만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어요. 한겨울에 눈이 내려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안 나왔는데 제가 그날도 나가서 물건을 펴놓고 먼지떨이로 내리는 눈을 계속 털었어요. 하루 종일 딱 바지 한 장을 팔고 2천원을 남긴 거예요. 저녁 때 와서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해서 둘이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순댓국을 먹으러 갔죠. 제가 무척 안쓰러웠나 봐요. 지금도 가끔 그날 이야기를 해요.”

노점을 그만두고 올해 초까지 슈퍼마켓, 치킨집 등을 운영하면서 매일 새벽 서너 시까지 일을 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꿈이 있고 목표가 있고 그리고 자신을 위해 평생을 일했던 아버지처럼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언제나 말없이 묵묵하게, 고집스럽게 말이다.


노래를 부르며 새삼 느낀 부모님의 위대함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며, 또 아버지로서 자신의 삶을 그려보며 부른 노래 ‘아버지’는 그에게 아주 소중한 곡이다. 꾸미거나 덧입히지 않은, 투박하지만 펄떡이는 그의 진심을 담은 노래이기에 녹음을 할 때도 눈물이 나서 여러 번 녹음이 중단되기도 했다.

 

“노래를 부르는데 제가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동안 부모님께서 겪으셨을 고단한 삶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내내 뭉클했습니다. 어릴 때 침을 잘못 맞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거의 못 쓰시면서도 그렇게 평생 머슴일, 소 중개인, 농사일을 해오신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저 여섯 살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새벽 내내 손질한 도라지, 토란, 무, 감자 등을 네 시간씩 걸려서 갖고 나가 행상을 해오신 어머니께 감사해서요.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지요. 노래 녹음을 하면서 새삼 부모님의 위대함을 느꼈어요.”

 

명절은 물론이고 고향집에 내려갈 때마다 참기름 한 병이라도 더 주고 싶어 분주한 부모님을 마주할 때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더욱 성실하고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부모님과 또 영화 덕분에 행여 못 이루면 어쩌나 걱정했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도 한없이 감사하기만 하다. 다만, 가장 우려가 되는 부분은 노래를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실제로 일부에서는 그를 두고 ‘아버지 유명세에 업혀가는 사람’ 정도로 폄하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얼마 전에 앨범이 나오고 한 방송국 프로그램 PD에게 앨범을 드리면서 인사를 하러 갔었어요. 전해드리고 돌아 나오는데 뒤통수에 말 한 마디가 꽂히더라고요. ‘나이 마흔이나 되어가지고 아버지 덕에 앨범 냈네. 트로트 하면 돈 번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뛰어드나 보지’라고요. 돌아가서 다시 정중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노래 한번 들어보시고 보잘것없다 싶으면 버리셔도 된다고요. 아버지와 영화가 제 꿈이 훨씬 일찍 실현되도록 해준 건 사실이지만 ‘반짝’하고 싶어서 음반 낸 게 절대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이루고 싶었던 목표였고 그동안 꾸준히 준비도 해왔다고 말씀드렸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두 배, 세 배로 더 노력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동안 많지는 않지만 당장 주저앉지는 않을 정도로 돈도 벌었고, 제 나이 때 겪지 않아도 될 웬만한 고생도 많이 해봤다. 이제는 그저 ‘하고 싶은’일을 해보고 싶을 뿐.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품었던 목표에 ‘도전’하고 이뤄내고 싶은 마음에 또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주에는 수원에 있는 경로당에서 공연이 있습니다. 스무 분 정도가 계시다고 들었는데 영화를 보시고 무척 감동을 받고 좋아하셨대요. 그 주인공 아들이 앨범 냈다는 기사를 보고 연락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 어머니 얘기도 듣고 싶고, 노래도 듣고 싶은데 얼마나 줘야 와줄 수 있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10원도 안 주셔도 된다고 했죠. 오늘은 가서 그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노래 반주를 준비해야 해요. 재미나게 해드리고 오고 싶어요.” ‘반짝’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정통 트로트를 통해 사람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전하고 싶다는 최명진씨. 평생을 우직하고 묵묵하게 굽이굽이 한길을 걸어오신 부모님처럼 그도 사랑하는 가족에게 그런 믿음직한 아버지가, 아들이, 형이, 동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친구로, 동료로, 동반자로 함께해온 소와 아버지처럼 그는 노래와 그 진한 우정을 나누고 싶다. 오랜 시간 다듬어온 그의 간절한 꿈이 이제 따뜻한 숨을 쉴 수 있게 돼 정말 다행이다 싶다. 그리고 이런저런 말은 하지 않으시지만 그런 아들을 향해 굽은 허리를 펴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최원균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부자(父子)의 따뜻한 정도 담뿍 느낄 수 있었다.

 

해 질 녘, 습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너른 들판에 부자가 사이좋게 서 있다. ‘뎅, 뎅, 뎅’ 환청처럼 어디선가 워낭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앞으로 또 한번, 영화 이상의 감동을 느낄 날이 올 것만 같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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