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노숙자에서 CEO로 성공한 강신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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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레이디경향[http://lady.khan.co.kr]
  • 09.09.03 14:22:17
  • 조회: 1392

 

“노숙자들이 포기하지 말고,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희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요”

   

■ IMF로 돌침대 사업 하루아침에 부도
 에스보드는 스케이트보드의 한 종류로 최근 몇 년 사이 청소년과 젊은 층에서 새로운 레저 용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제품이다. 스케이트보드와 형태는 유사하나, 앞뒤 발을 따로 구르면서 앞으로 나가기 때문에, 일명 ‘흔들어서 나아가는 구름판’이라고 불린다. 보드 운행 방식은 다르나 스케이트보드의 스릴과 재미를 얻을 수 있고 유산소운동과 하반신 근육운동 효과까지 있다. 에스보드는 국내에서 이미 30만 개 이상 팔렸을 정도로 반응이 좋고, 미국에서는 2백만 개 이상 팔렸다.

 

신개념 스포츠용품인 에스보드를 개발한 사람은 ‘슬로비’의 강신기 대표(50). 에스보드로 인해서 지금은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스타가 됐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가 불과 9년 전만 해도 서울역 역사 안에서 노숙을 했다는 것이다. 한때는 그도 돌침대 가구 대리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으며 살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 관리를 하지 않았던 탓에 1997년 IMF 당시 부도를 맞았다.

 

“1997년, 아들이 막 태어나자마자 회사가 부도가 났죠. 회사를 모두 정리하고, 집도 팔고 충주의 처갓집 근처에 11평짜리 주공아파트를 얻었는데, 그것도 경매에 넘어갔어요. 집주인에게 사정해서 월세를 얻어 가족은 충주에 두고, 저는 서울에서 살 궁리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사우나, 고시원 등을 전전하는 것도 돈이 들잖아요. 그 돈이 아까워서 노숙을 했어요.”


■ 서울역 노숙, 요령이 생기다
노숙 생활은 생각보다 고되고 힘들었다. 처음 노숙한 날은 2000년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는데, 첫날은 결국 추위를 참지 못해 사우나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후회했다. 노숙을 결심하고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정신 상태로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는 자괴감이 든 것이다.

 

그 다음날에는 이를 악물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종이 박스를 깔고 누웠다. 돈이 없어서 노숙을 하는 게 아니라, 해병대 체험하듯 노숙 체험을 하는 중이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하지만 12월 매서운 바람 때문에 2시간 간격으로 깨기 일쑤였다. 간혹 난로 근처에서 불을 쬐려고 하면 지하철 관리 요원들이 쫓아내, 그들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노숙 생활에도 조금씩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노숙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바람이 거의 불지 않더라고요. 거기에 박스를 깔고, 신문지나 이불을 구해서 덮고 자는 거예요. 이불과 비닐을 같이 덮으면 온기가 쉽게 빠져 나가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냉장고 박스를 잘 접어서 가지고 다니기도 해요.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다들 살아가는 요령이 생기는 거죠(웃음).”

 

노숙자들 사이에는 이미 노숙 생활을 오래 해온 터줏대감도 있다.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오는 사람들, 빚이 많은 사람 등 희망의 끈을 놓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밤낮으로 술만 마시면서 자포자기한 인생을 산다. 혹한기, 술에 취해 아무 데서나 잠이 들었다가 객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신기하게도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는 게 싫어서 벽에 기대서 신문만 봤죠. 휴대폰도 없으니까 사람들과 연락도 안 됐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망한 사람으로 인식돼 있었죠.”

 

간혹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하면서 삶의 의지를 갖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새벽에 인력 시장에 나가서 일용직 노동자로 돈을 벌기도 했다. 강 대표 역시 인력 시장에 따라가 일용직으로 돈을 벌었고, 한 달에 20만~30만원을 모아 가족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제가 노숙을 할 때는 40, 50대 남자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20대 젊은 남자들도 많더라고요. 여자들도 보이고요. 지나가면서 서울역 노숙자들을 자세히 보면, 사지가 멀쩡한데도 일을 하지 않고 우유 곽을 차면서 놀더라고요. 삶에 대한 의욕이나 희망 없이 남에게 의지하면서 사는 거죠. 그런 희망 없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보기 싫어요. 저는 노숙자들이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희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요.”


■ 에스보드, 애들 장난감이라고 홀대받아
강 대표가 서울역 노숙 생활을 끝낸 건 이듬해 4월 초 봄이 되면서다. 그동안 인력 시장을 통해 다시 일을 할 마음의 준비를 다졌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사실 강 대표는 IMF 이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던 가구 대리점 사업을 했고, 그 이전에도 업계에서 영업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때 다시 영업을 시작하면서 먹고살 일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친구 사무실에 들렀다가 좌우로 흔들면서 타는 스케이트보드(지금의 에스보드)를 타고 돌아다니는 학생을 발견하게 된 것. 그 스케이트보드는 그 학생이 발명한 것이었다.

 

“처음 그 스케이트보드를 보는 순간,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개발한 물리학도 출신의 학생에게 동업을 제의했더니, 거절하더라고요. 그래서 5천만원을 주고 특허를 샀어요. 돈은 나중에 투자받으면 준다고 하고 말이죠. 그 스케이트보드를 수정해서 개발한 것이 바로 에스보드였죠. 그걸로 사업을 하겠다고 했더니, 친구들은 아이들 장난감으로 무슨 사업을 하냐며 가족 먹여 살릴 생각이나 하라고 충고하더군요.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죠.”

 

에스보드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투자자를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투자를 받기 위해 안동공단과 시화공단 등을 돌아다니면서 4개월 동안 발품을 팔았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포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가서 에스보드를 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보기로 했다.

특히 고급 세단이 지나갈 때 옆에서 시선을 끌 수 있는 묘기를 보이곤 했다. 간혹 세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제가 개발한 스케이트보드인데, 어른들도 탈 수 있는 건강 레저용품입니다. 혹시 여기에 투자하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4개월간 그렇게 길거리 묘기를 부리던 중에 한두 명의 투자자가 관심을 보였고, 드디어 에스보드가 생산돼 세상으로 나왔다. 기술신용보증기금에서 그 가치를 평가받아 15억원이라는 정부지원금을 받게 된 덕분이다. 에스보드 사업에 날개를 단 것이다.


■ 중국 카피 제품 소송비만 15억원
처음 에스보드 시판을 시작한 건 2006년 5월 어린이날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생각보다 폭발적이었고, 그해 10월까지 거두어들인 판매수익이 90억원 정도였다. 앞서 2003년에는 한국기술특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2004년에는 미국 피츠버그 국제발명대회에서 5관왕을 수상하면서 상금도 2천달러나 받았다. 이런 성과는 레저용품의 불모지에서 거둔 뜻 깊은 쾌거였다.

 

이 일이 국내 유명 일간지 1면에 소개되면서 각종 공익광고, 다큐멘터리 등 언론과 방송 인터뷰가 쇄도했다. 특히 개발자인 강신기 대표가 노숙자 출신이라는 점이 드라마틱하게 부각되면서 에스보드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갔다. 하지만 그의 승승장구에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중국의 카피 제품들이었다. 에스보드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중국에서 불법복제 제품을 똑같이 만들어 국내에서 팔기 시작한 것.

 
“에스보드는 지금까지 국내에 30만 개 정도 판매했는데, 중국 카피 제품은 1백만 개 이상 팔렸어요. 중국 카피 제품의 시장 점유율이 더 높은 거죠. 지난 2007~2008년은 카피 제품을 파는 업체들을 상대로 소송만 하다가 시간이 다 지났죠. 소송비만 15억원 정도 들었어요.”

 

카피 제품을 파는 업체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별도로 단속을 하지 않아서, 강 대표가 일일이 업체들을 경찰에 신고해서 소송을 진행해야 했다. 50여 명이 똑같은 카피 제품을 판매하고 있어도, 한 명씩 따로 신고해야 했다. 굉장히 힘들고, 고된 시간이었다. 에스보드의 제품 개발과 생산, 홍보, 관리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에서 카피제품을 상대로 체력 소모전을 벌였다. 물론 소송은 대부분 승소했다. 하지만 판매업체 대부분이 신용불량자로 돈이 없는 사람들이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2년 동안 법원에 가서 변론하고, 카피 업체들과 말다툼을 하다 보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패닉 상태가 될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없는데, 지적재산권의 보호가 철저하지 않아서 참 안타까워요. 제가 너무 답답해서 검찰, 대법원, 청와대, 특허청, 산업자원부 등에 호소문도 보내봤는데, 특별한 해법이 없더라고요. 제가 한때는 공익광고를 통해 사람들의 희망처럼 비춰졌지만, 중국의 카피 제품 때문에 허무하게 당하고 있다는 게 슬픈 현실이에요.”

 

그동안 소송을 50여 건 진행해왔지만, 여전히 한국에는 에스보드 카피 제품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정품의 판매율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 몇 년간 미국에서 판매하면서 받은 로열티를 제외하면, 최근 들어 국내의 판매 매출은 현격히 떨어진 상태다. 2006년에는 매출 90억원, 2007년에는 60억원인데 이 중 로열티가 80%, 2008년은 60억원인데 이중 로열티가 90%에 해당한다.


■ 요즘이 IMF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
설상가상으로 미국 회사에서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아 소송을 하다가, 변호사 비용만 30억원에 이르면서 결국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특허권을 미국에 넘기기로 했다. 앞으로는 미국으로 판매되는 제품의 로열티 수입마저 끊기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제가 IMF도 겪어봤지만 요즘이 그때보다 더 경기가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다고 해도, 성공 궤도에 안착하기는 정말 힘들어요. 정치·사회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바로 타격을 받는 게 중소기업이거든요. 해외에 나가면 작은 나라에서 작은 기업을 하는 게 서글프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물론, 에스보드 이외에 새롭게 시판될 레저용품도 6, 7개 정도 대기 중이다. 하지만 지적재산권에 대한 제도가 좀 더 철저하게 보완되지 않는다면, 에스보드처럼 카피 제품으로 정품이 사장될 위기에 놓일 수도 있다. 때문에 강 대표는 앞으로 가장 빨리 풀어야 할 숙제가 바로 지적재산권 보호 문제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 문제만 해결 된다면 제 2의 에스보드 대박신화는 시간문제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강 대표의 꿈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것,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가족과 단독주택을 짓고 여유롭게 웃으며 살고 싶은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안 해본 일 없이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그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가족 같은 회사를 만들어 성장시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복지단체에 참여하고, 선교활동도 하고 싶다. 한때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잠을 청했던 강신기 대표. 그때 가졌던 꿈과 용기를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 겪고 있는 사업 침체도 곧 풀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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