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42년만에 연극 ‘세자매’에 다시 서는 84살 노배우 백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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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08.19 09: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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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내가 연극인지, 연극이 나인지 모르겠어”… 1943년 ‘봉선화’로 데뷔 400여편 출연
ㆍ“은퇴는 생명을 잃는 것보다 슬플거야… 마지막 순간까지 노장의 열정 다할것”

 

지난 66년간을 무대 인생으로 살아온 노배우의 몸에는 어떤 피가 흐르고 있을까. 국립극단 원로단원 백성희 선생(84)은 그 자체가 한 편의 희곡이요, 무대없는 연극 같았다. 42년 전 국내 초연된 <세자매>가 9월4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고 백 선생이 다시 새 배역을 맡았다는 소식에 남산의 국립극장으로 찾아갔다. 백 선생은 젊은 단원들과 섞여 한여름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연 채비에 바빴다.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지자 제일 먼저 빼어문 것은 담배였다.

 

“26살에 공연한 <마리의 비밀>이란 연극에서 마리 역을 맡았는데, 지문에 ‘달빛 아래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라고 적혀 있어요. 그때 멋지게 연기할 욕심에 어지럼증을 참아가며 난생처음 담배를 태웠지요. 뭐든지 연륜이 쌓이면 익숙해진다는데…. 무대에선 익숙한 게 하나도 없어요. 담배나 익숙해졌을까. 한 갑씩 태웠는데 요즘은 하루 10개비 정도예요.” 젊은 배우에게서 흔히 체력단련을 위해 술과 담배를 끊었다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노장 배우에게 ‘그딴 것’은 문제가 아닌 듯했다.

 

“초연에 나왔던 <세자매> 여배우들 중 현역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지요. ‘나타샤’ 혼자 남았네요. 아참, 그때 나타샤 남편 역을 장민호 선생이 했어요. 체호프가 생경하고 작품이 어려웠던지 관객이 많지 않았어요. 객석에서는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이 나왔지요. 연극적 재미는 개의치 않고 원작 전하기에 바빴으니까요. 이번 공연이 더 재미있을 거예요. 그런데 요즘처럼 연극이 지나치게 행위하고 육탄으로 보여주려는 것도 문제이긴 해요.” 백 선생은 당시 세자매의 올케 ‘나타샤’ 역을 맡았다. 이번에는 세자매를 키워온 80대 유모를 연기한다. 공교롭게도 유모는 젊은 나타샤로부터 “늙고 쓸모없다”며 집에서 나가라는 위협에 시달린다. 늙은 몸은 몰락한 한 시대를 상징하기도 한다.

 

“체호프가 왜 유모를 작품에 넣었을까요. 요즘 열심히 찾고 있어요. 단역의 고충을 새삼스럽게 느낀다고 할까. 이젠 단역을 종종해요. 한데 무슨 역할을 따지겠어요. 요조숙녀에서부터 요부, 인민군장교,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인 무녀까지 안해본 인물이 없어요. 한 400여명의 인생을 살아봤지요.” 1994년 자서전을 내면서 출연작을 400편으로 어림잡았다. 그후에도 15년간 꾸준히 작품을 해왔으니 실제로 400편이 훨씬 넘는다. 공식 데뷔작은 43년 현대극장의 <봉선화>. 50년 국립극단의 창립단원으로서 연극의 한 길을 걸어왔다. 72년, 91년 여성으로는 유일무이한 국립극단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공연한 <백년언약>에서는 새댁에서 노인에 이르는 일생을 담은 주연으로 2시간 내내 퇴장없이 무대에 올라 세간을 놀라게 했다.

 

“10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3대 독자여서 어머니가 100일 기도 끝에 나를 얻으셨지요. 부처님 모시듯 키우셨다고 해요. 그러니 딴따라 딸을 상상이라도 했겠어요. 죽는 꼴 보느니 눈감아주자고 어머니가 편들어줘서 겨우 (배우생활) 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집에서 숨어살다시피 했어요.” 그는 수십년 동안 연극하면서 학교와 집안식구가 누구인지 한 번도 입밖에 내지 못했다고 한다. 성과 이름까지 바꾸고 살았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작은 외삼촌이 가져온 ‘다카라즈카 소녀가무단’ 팸플릿을 본 것이 배우인생의 발단이 됐다. 화려한 옷을 입은 멋진 배우의 모습에 막연하게 꿈꾸기 시작했다. 동덕여자고등학교 시절 가극단이 함께 운영되던 ‘빅타 무용연구소’에 연구생으로 몰래 들어가게 됐고 그곳에서 무용기초를 다진 덕분에 지금도 몸이 유연하다.

 

“무릎에도 이상이 없고 몸놀림에 아무 불편이 없어요. 그러니 이제와서 (배우를) 그만 둘, (연극을) 못해야 하는 이유가 없잖아요.” 선생은 여전히 여배우다운 고운 얼굴을 지녔다. 지난해 한 후배가 ‘선생님, 볼살이 예전같지 않으니 보톡스 맞으시면 어때요’라고 물어왔다. “이 나이에 무슨” 하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쌍꺼풀 수술이 처음 들어왔을 때 맨 먼저 했다면서 “그래도 여배운데…”라고 웃었다. “한창 때는 62㎏으로 글래머 축에 끼었어요. 실험극장 대표였던 고 김동훈씨가 자기 책에다 ‘다리가 유난히 예쁜 아가씨’라고 썼어요. 이젠 키도 줄고 몸무게도 빠졌어요. 지금은 48㎏이에요. 나이드니 몸도 그에 맞게 소용되도록 하는 거겠지요.” 작아진 체구 안에는 70년 가까이 살아온 배우의 삶이 응축돼 있는 것 같았다. 수백편의 희극과 비극을 오고갔을 그에게 삶의 비극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때 같아요. 14살 위였는데 연극한다고 집에서 눈치보며 살 때 힘이 된 사람이지요. 아저씨 같아서 철없이 ‘오야붕’이라고 불렀어요. 공연이 끝난 후 항상 바래다줬는데 눈이 엄청 내린 어느날 후암동 고개를 넘어 신당동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에 덜컥 청혼을 했어요.” 이때를 회상하는 선생은 마치 스무살의 처녀로 돌아간 듯 생기가 넘쳤다. “하얀 백지에 떨어진 한 방울 먹물처럼 가슴에 (사랑이) 퍼졌던 거지요….” 소설가를 꿈꿨던 남편 나조화씨는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의 작가로 요절한 나도향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선생은 남편과의 사이에 해방둥이로 낳은 외아들을 뒀다. 그 아들 역시 지난해 자동차회사에서 정년은퇴를 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지난해쯤 원로단원의 은퇴 얘기가 나왔다가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백 선생은 경이로움의 대상이지만 한편 은퇴시기를 두고 관심거리가 되곤 한다. “이제 그만둔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요”라며 처음엔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이내 “사실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 슬프겠지요”라고 고백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터처럼 앞만(무대만) 보고 살아왔어요. 좌우에 호사스러운 세월들이 지나갔겠지요. 이제 연극의 종말(내 수명)이 저기 내 눈 앞에 와 있을 테지요…. 행복하게 살았으니 지난 세월 후회는 없어요. 무대는 나에게 성실과 정의를 가르쳐주었어요. 무대에선 요만한 거짓도 안 통하니까. 발가벗고 나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게 무대잖아요. 인생도 마찬가지지요. 이젠 내가 연극인지, 연극이 나인지 모르겠어요.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불태우고 싶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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