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나라 전체가 안개도시가 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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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07.02 14: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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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장편소설 ‘도가니’ 펴낸 공지영

여귀(女鬼)의 하얀 머리카락처럼 공중에 흩날리는 안개로 가득한 도시 무진(霧津). 안개는 사물들을 지우고 사람들 사이를 차단시킨다. 안개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리일 뿐. 그러나 ‘소리’를 잃은 청각장애인들은 안개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안개가 가진 은폐와 음습한 기운의 정점에 ‘자애학원’이 있다.

“폭력이 갖는 야만성과 그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 교묘한 상류층들의 결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맞서서 완전히 싸울 수 없는 소시민적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소설가 공지영씨(46)가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상습적 성폭력이 벌어졌던 광주 인화학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 <도가니>(창비)를 펴냈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 지난 5월까지 6개월간 연재됐던 작품이다. 30일 기자들과 만난 공씨는 “낙후된 지역의 야만적 폭력, 지방 토호들에 대해 다뤄보려고 시작했는데 불행히도 소설을 쓰는 동안 나라 전체가 무진으로 변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무진은 김승옥의 유명한 단편소설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도시. 실제 소설의 처음과 끝의 설정은 <무진기행>에서 따왔다. 무진은 한때는 민주화의 ‘메카’였지만 지금은 ‘가난하고 퇴락한 도시’일 뿐이다. 사업에 실패해 무진으로 내려온 주인공 강인호는 지방 유지가 운영하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자애학원에 부임하는데 첫날부터 반 아이의 죽음과 맞닥뜨린다. 안개처럼 자욱한 불안감의 정체가 서서히 밝혀진다.

 

소설의 초반부는 자애학교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사건의 진상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학생들에게 가해진 교장과 교사들의 끔찍한 성폭행과 성추행, 구타가 드러나고 가해자는 구속돼 법정에 선다. 그러나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라는 소설 속 구절처럼 혈연·지연·학연으로 묶인 상류층의 끈끈한 ‘침묵의 카르텔’은 이들을 비호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 오히려 강인호를 전교조 교사 경력을 문제삼아 ‘좌파 교사’로 몰아세우고, 그의 과거를 들춰내 파렴치한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교장과 행정실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교사만이 6개월 형을 선고받는다.

 

“김용철 변호사가 제기한 삼성 비리 의혹을 국가 전체가 덮는 것을 보고 우리 사회도 단순히 독재 권력이 억압하는 게 아니라 상류 계층이 자발적으로 서로의 비리를 은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은 쉽게 진실이 승리한다는 낙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강인호는 마지막에 싸움을 포기하고 가족과의 안온한 삶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도망치듯 무진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무릎 꿇은 비겁자이기보다는 우리 시대 소시민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공씨는 “우리 모두가 이상적인 저항의 꿈을 꾸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휴지조각처럼 찢어버리고 떠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며 “1980년대라면 배신자로 찍혔을 강인호를 감싸안는 설정은 저의 성숙이고 소설에 현대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밝혔다.

 

<도가니>는 첫 인터넷 연재라는 점에서 공씨에게 더 의미가 깊다. 공씨는 “작품을 탈고하고 보름째인데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집에만 있다”며 “6개월간 광장에서 사람들이랑 합숙한 후유증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사형제,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등 우리 사회의 폐부를 드러내는 소설을 써오고 있는 공씨는 이번에는 박종철 사망 사건을 사회적 문제로 만드는 데 기폭제가 됐던 법의학자 황석준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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