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타인을 통해 ‘맨얼굴의 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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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06.23 09: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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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모던한 방식으로 그린다거나 연애담을 걸쭉하게 쓰는 데는 장기가 없어요.” 작가 강영숙씨(43)가 고립되고 소외된 도시인들의 삶, 실패한 연애담을 무심하고 건조하게 묘사함으로써 도시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세 번째 소설집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문학동네)를 펴냈다. 2004년부터 써온 9편의 소설을 묶은 이 소설집의 주인공은 ‘도시’다.


특별한 사건은 없다. ‘어, 이렇게 그냥 끝나네’라고 생각이 들 만큼 어떤 일이 벌어져 국면의 전환이 일어날까 싶으면 그냥 지나가버린다. 도시인의 권태롭고 우울한 일상이 이어질 뿐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령’의 주인공은 선거 후보자들의 연설장에 갔다가 붐비는 인파 속에서 한 남자를 자신을 배신한 남자로 착각하고 주머니에 있는 칼로 찌른다. 하지만 피가 튀는 사건은 없다. 남자는 “돌았군”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릴 뿐이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지만 그것조차 평범한 일상이 돼버린 도시의 모습 그대로다.


세 편의 소설은 6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썼다. 표제작인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에 나오는 매립지와 모노레일이 등장하는 도시가 낯설다고 했더니 “도쿄의 오다이바를 배경으로 썼다”고 답했다. 그러나 소설 속 도시들은 어떤 곳이라고 짐작만 가능할 뿐 특정한 곳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시의 삶이 세계화로 인해 지역의 특수성을 잃고 획일화된 만큼 그는 도시 자체를 익명화시킨다.
“도시는 특별한 공간이 아니고 보통 사는 사람들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

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디서나 스타벅스를 마시고, 일상생활 자체는 비슷하잖아요.” 문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장편소설 <리나>에서 단순한 탈북서사를 넘어서는 ‘경계 넘기’를 보여줬던 강씨는 이번에도 ‘월경’을 시도한다. 그들이 넘는 것은 ‘언어의 국경’이다. 주인공들은 고립되고 소외된 제3자와의 소통을 통해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바다를 매립해 만든 도시에 사는 ‘빨강…’의 주인공 령은 바다를 보고 싶어하지만 도시에서는 끊임없이 펼쳐진 매립지만 보일 뿐이다. 그러던 중 맹인 노인과 함께 찾
아간 점자도서관에서 점자책을 읽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던 바다를 보게 된다.


‘갈색 눈물방울’에서 실연의 상처를 입고 실어증에 걸린 주인공은 어려
움에 처한 이웃의 스리랑카 여성을 도우면서 말문이 트인다. 영어 학원에서 급작스레 말문이 트인 그녀는 영어로 스리랑카 여성의 삶에 대해 유창하게 이야기한다. 강씨는 “제3자를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며 “다른 사람 삶으로 들어가면 내가 다시 보이고,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소설집에서 또 눈에 띄는 것은 ‘이상기후’다. 소설 속에는 황사·
폭우·사이클론 등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위태로운 도시인의 삶과 맞물려 나타난다. 1주일에 이틀씩 NGO인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일하는 강씨는 “직장에서 환경과 생태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는다”며 “날씨로 인해 개인의 일상 삶 자체가 굉장히 많이 바뀌는데 그런 것들에 집중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진 ‘문장’에 장편 <크리스마스에는 훌라를>을 연재 중인 강씨는 오는 8월 연재를 끝내고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 아이오와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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