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쾌락 그 이상의 통로, 男色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 [http://www.khan.co.kr]
  • 09.06.03 11:09:32
  • 조회: 11958
中 명·청시대 남성 동성애의 기록. 남자, 남자를 사랑하다
우춘춘 | 학고재

남색(男色)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존재해온 성애 방식이다. 하지만 중국 명·청시대처럼 전체 사회를 풍미한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특히 당시 ‘미소년’에 대한 성애적 열광은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술자리 시중을 들며 노래하던 연동(戀童)들이 넘쳐났고, 남성이 전문적으로 매음하는 남원(男院)도 성업했다. 미소년이 여성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는 이장벽(異裝癖)도 성행했다. “미녀를 중하게 여기지 않고 미남을 중하게 여긴다” “가동(歌童)은 있어도 명기(名妓)는 없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책은 명 말기부터 청 말기까지 400여년에 걸쳐 사대부 남성들을 사로잡은 남성 동성애 풍조를 풍부한 문학적 사료를 통해 추적해낸다. 남색으로 인해 생겨난 기묘한 사회현상뿐만 아니라 그 아래 깔린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드러냈다. 저자에 따르면 명·청시대 남색이 범람한 배경에는 당시의 욕망방조 풍조가 놓여 있다. 명나라 말기 경제적 번영과 부의 축적은 쾌락주의 풍조를 낳았다.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양명심학(陽明心學)이 유행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욕망은 지극히 인정받았고 어떠한 형식의 성적 행위도 암묵적으로 허용됐다.

특히 남색 풍조는 신기(新奇)를 찾아 즐기던 사대부 남성들이 발견한 색다른 성적 유희였다. 그들은 연동을 끼고 노는 게 풍류생활 가운데 최대의 쾌락이라고 여겼다. 이 같은 풍조는 왕조가 바뀐 뒤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단의 선비들은 남색에 더욱 탐닉하는 것을 일종의 소극적 저항으로,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으로까지 여겼다. 책은 남색 풍조가 당대의 문학예술과 미적 기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명나라 말기에는 남성 동성애를 제재로 삼은 소설이 출현하면서 전례없는 ‘동성애 문학’을 형성했다. 청나라 건륭제 이후 희곡이 번성하게 된 것도 당시 사람들이 예술에 대한 열정이 넘쳐서가 아니라 “남색을 매우 중히 여기던” 사회 풍조가 더해져 낳은 결과였다. 전통극을 품평한 이 시기의 많은 저작들은 모두 여성 배역만을 거론했고 기예보다는 ‘색’(色)을 중시했다. 관객들이 극장에 가는 이유도 여장 남성배우인 상공(相公)의 자색을 보고 즐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부자들은 연극이 끝난 뒤 상공을 데리고 ‘2차’를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가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은 남색 풍조가 철저히 계급주의와 남성 중심주의에 기반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남성 동성애 관계는 ‘주종관계’가 압도적이었다. 남색의 주동자는 돈과 지위를 갖춘 상류층으로 이들은 성적 유희로서 남색을 즐겼다. 반면 피동자는 지위가 낮고 천해 몸을 파는 계층으로 그들의 동성애 활동은 대부분 굴종과 매음에서 출발한 것이지 동성애에 대한 흥취에서 시작된 게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이러한 풍조는 철저히 남성에 속한 것으로 여성과는 인연이 없었다. 오히려 이 같은 풍조는 여성의 금욕을 기초로 했다. 저자는 “남성이 성적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새롭게 도달한 높은 인식 수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비인도적인 억압과 금욕의 강요를 통해 획득한 것”이라고 말한다. 원저 <명청사회성애풍기(明淸社會性愛風氣)> 가운데 남성 동성애 부분을 뽑아 번역한 책이다. 이월영 옮김. 1만4000원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