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울다가 웃다가 고독을 넘는 ‘원맨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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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 [http://www.khan.co.kr]
  • 09.05.15 09: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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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고독하다, 현대인은 소통이 단절됐다, 현대인은 자아를 잃었다. 1950년대 이후 너무나 많은 예술가들이 다루어와서 ‘진부하다’는 비판조차 진부한 주제다. 14일 개봉하는 <김씨 표류기>는 현대인의 고독, 소통 단절, 자아 상실을 전면에 내세운다. 남우는 헐벗었고, 여우는 목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나온다. 둘은 영화 내내 만나지 못한다. 무인도 표류기를 그린 영화라곤 하지만, 주인공은 한강의 밤섬에 머문다. 야생동물이나 태풍의 습격에 이어지는 스펙터클,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없다. 데이트 관객을 유인할 연애담, 혈기왕성한 10대를 끌어들일 모험담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김씨 표류기>는 수작이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상업적 재미도 쏠쏠하다. 티켓을 살 때는 미심쩍었으나, 극장문을 나설 때는 웃을 가능성이 높다. 남자 김씨(정재영)는 삶의 벼랑에 섰다. 일자리는 얻기 힘들고 사채는 갚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났으며 때마침 애인은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한강 다리 위에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너저분한 쓰레기가 밀려드는 밤섬에서 정신을 차린다. 구조를 기다리고, 다시 한 번 자살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 그는 이왕 죽으려고 한 이상 굳이 세상에 나갈 의미가 없다며 밤섬에서의 삶을 선택한다.

밤섬 맞은편 고층 아파트에는 여자 김씨(정려원)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방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온 여자다. 다른 사람의 예쁜 사진을 스크랩해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는 방식으로 인터넷에서만 동경받는 사람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달을 관찰하기를 좋아하던 여자는 성능 좋은 망원 렌즈로 남자 김씨의 존재를 알아챈다. 세상에서 버려진, 혹은 세상을 버린 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을 맺는다.

초반 30여분간은 모노드라마에 가깝다. 밤섬에 홀로 남겨진 정재영이 단독으로 영화를 끌어나간다. 감독이 깔아둔 슬픔의 멍석 위에서 단련된 배우 정재영이 관객의 웃음보를 잡아 흔든다. 배우가 우는데 관객은 웃고, 배우는 웃는데 관객이 우는 상황이 연출된다. 무인도에서의 ‘원맨쇼’가 익숙해질 무렵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는 은둔형 외톨이가 된 여자 김씨의 옛 사연을 알려주지 않는다. 여자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원하는 물건은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고성능 카메라같이 필요한 모든 것을 방안에 갖추었다. 인터넷에서의 가짜 자아에 쏟아지는 익명의 찬사에 위안받는 여자는 ‘뿌리 없는 고독’에 고통을 겪는 중이다.

‘뿌리 없는 고독’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은 일본의 인디 영화에서 잘 다루었던 주제다. 하지만 일본의 인디 영화가 고독을 ‘제스처’로 그리는 경우가 있는 반면, <김씨 표류기>의 고독은 현대인 삶의 조건에 뿌리를 내렸다. 심심치 않게 터지는 유머는 심각한 주제를 쉽게 삼킬 수 있게 하는 당의정이다. 남자 김씨가 자장면 한 그릇을 만들어먹기 위해 벌이는 에피소드가 극 중반의 하이라이트다. 적어도 절반 가까운 관객은 영화를 보고난 뒤 자장면이 먹고 싶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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