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엄숙함’ 덜어내고 ‘재미’를 더했어요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04.17 09:09:06
  • 조회: 11788
무게감 있고 진지한 소설로 ‘엄숙하다’는 평까지 듣는 순수문학 작가 정씨가 역사 판타지 소설 <고구려 국선랑 을지소>(1·2권·랜덤하우스)를 펴냈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가 뚜렷해 작가군의 이동이 거의 없는 국내 문학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어느 순간 이야기들이 작가를 찾아오는 것 같아요. 2년 전 기(氣)를 공부하는 지인에게 고구려의 국선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머릿속에 이야기가 마구 떠올랐어요. 그동안 제 소설이 무겁고 진지하다는 젊은 독자들의 평이 있었는데, 젊은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죠. 특별히 판타지 소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닙니다.”

정씨를 사로잡은 것은 ‘기’의 세계보다는 고구려의 세계관이었다. 태양계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소천(小天) 사상은 중화중심주의에 갇힌 반면, 고구려는 태양계를 넘어 북두칠성이라는 대천(大天)을 숭상했다. “북두칠성은 별 하나만이 중심이 아니라 각기 자기 질서 안에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정신은 자생뿐 아니라 공생에도 있었어요. 자생공생의 세계관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은 고구려 말기, 수·당의 끈질긴 공격을 물리치고도 결국에는 내부 분열로 자멸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역사의 안타까운 장면을 배경으로 한다. 천성이 착한 을지문덕의 손자 을지소를 주인공으로 당나라에 멸망한 돌궐족 출신, 노비 출신, 귀족의 자제, 고구려의 태자까지 다양한 출신 성분을 가진 8명의 소년들이 고구려의 전통무예 학교인 국선학당에 들어가 무공을 쌓으며 조의선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패망한 조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입신을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서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그들은 때때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지만 갖은 관문을 통과하며 ‘자생과 공생’이라는 가치를 깨달아간다.

금강산과 고구려 국경을 배경으로 소년들의 모험담은 박진감 넘치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각각의 캐릭터들은 이야기를 흡인력 있게 끌고나간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다. 민족과 계층에 따른 차별과 폭력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패배에 관심이 많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만을 담는데,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진 자들의 자세와 삶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성공만을 강조하고 남을 밀어내고라도 내 것을 챙기라고 학습시키는 현대사회에 고구려의 자생공생 정신이 필요합니다.”

정씨는 빨치산이었던 부모의 이야기를 그린 <빨치산의 딸>로 유명하다. 빨치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따온 이름 ‘지아’가 현대사의 비극을 담고 있듯이, 비극적 역사 속에 뒤틀린 인간의 상처를 형상화한 작품들을 주로 써온 정씨였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잘 만들어진 역사 판타지 소설이 정씨와 같은 작가에 의해 쓰였다는 것은 우리 문학계의 희소식이다.

“제 세대에는 장르소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어떤 소설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어떤 장르를 쓰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을 가르는 기준도 상당히 애매합니다. 현재로서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가리지 않고 쓰고 싶어요.”

정씨는 현재 다시 진지하고 묵직한 스타일로 돌아가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 3일간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다. “아버지의 빨치산 동료, 아버지가 살려줬던 경찰 등 다양한 사람이 장례식에 왔어요. 아버지의 한 생이 3일간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