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청년 백수의 수상한 기웃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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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03.23 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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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을 보고 나면 광화문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소설을 썼어요. 소설을 쓰다보면 구직으로 인한 초조함이 없어지기도 했죠. 커피숍의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다보면 이상한 사람이나 궁금한 사람이 생기곤 했는데, 그런 사람들을 미행한다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습니다.”

비오는 날만 되면 우산을 들고 서울 일대를 돌아다니는 수상한 청년 백수의 이야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인 한재호(30)의 <부코스키가 간다>(창비)다. 대학 졸업 후에도 학교 근처 자취방을 떠나지 못하는 주인공은 하릴없이 인터넷 구직사이트를 뒤지고 이력서를 쓴다. 운이 좋아 서류가 통과되면 이따금 면접을 본다. 여기까지는 일반 백수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의 일상에 변화가 생긴다. 술김에 하룻밤을 함께 보낸 후배와 대면하기 어색해 무작정 거리를 걷다 찾아간 식당에서 그는 비만 오면 검은 우산을 펴들고 거리를 쏘다니는 ‘부코스키’라는 사내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딱히 호기심이 동한 것도 아니면서 비오는 날 부코스키를 쫓기 시작한다. 부코스키는 종로, 신촌부터 평촌, 범계까지 서울 주변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부코스키가 하는 일에 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종로거리의 골목을 몇시간이나 돌아다니다 결국은 허름한 중국집으로 들어가 ‘세트 B’를 시켜먹는다.

아리송한 단서들이 곳곳에서 출몰해 궁금증을 자극하지만 그것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 결정적 단서가 되지 않는다. 부코스키를 쫓는 행위가 비오는 날의 행사가 돼버린 즈음, 그는 부코스키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동시에 자신을 쫓는 또다른 ‘검은 우산의 사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추리소설 형식을 따왔지만 소설은 정작 부코스키의 정체에는 관심이 없다. 부코스키는 다만 비오는 날 외출을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주인공이 부코스키를 쫓듯 다른 사내도 단순한 호기심으로 주인공을 쫓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결국 그 쫓고 쫓기는 게임의 의미나 해답은 없다. 대신 소설의 질문은 주인공의 내부로 향한다. 스스로를 ‘사회를 기웃거리는 강아지’라고 인식하며 특별한 자의식도 없던 주인공은 수많은 질문과 맞닥뜨린다. 결국 부코스키는 주인공에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환기시키는 구실을 한다.

소설은 명확한 해답이나 탈출구를 제시하지 않지만 주인공이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한씨는 “백수 문제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이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설령 직장을 가졌다고 해도 잠시 땡볕을 피하는 정도에 불과했다”(64쪽)고 말하고, “부코스키를 버려야 할 것이다. 혼자 이 게임의 전임자가 되어 검은 우산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206쪽)라고 되뇌는 것은 이런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소설 곳곳에는 대학을 마친 후 구직활동을 하며 소설을 썼던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었다. “소설의 주인공이 주변 인물에게 부코스키를 쫓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도 면접에 대답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에요. 그런 식으로 쓴 걸 보면 면접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아요.”
각종 문예지의 소설 공모에서 ‘당편작 없음’이 잇따른 가운데 장편소설로 데뷔한 한씨는 “좋기도 하고 부담도 된다”며 서울 거리를 소재로한 다음 장편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부코스키란 이름의 정체는 무엇일까. “좋아하는 미국 작가 찰스 부코우스키에서 따왔습니다. 평생 잡역부처럼 아웃사이더로 살며 시스템을 거부했던 작가죠. 그의 이름을 딴 건 그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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