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거짓과 위장술…야수의 욕망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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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03.10 09: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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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범죄행동 촘촘히 역추리… 프로파일러가 벗긴 우리사회 ‘악의 가면’

인간이라는 야수

토마스 뮐러 | 황소자리



루츠 라인슈트롬. 두 여자를 플라스틱통에 쑤셔넣고 염산으로 녹여버린 연쇄살인범. 2003년 10월17일 독일 함부르크 풀스뷔텔 형무소에서 마주했다. 친절했다. 공손한 말투에 절제력과 자신감을 겸비한 태도. 그가 내준 차를 석 잔이나 마셨다. 문득 깨달았다. 그는 단 한 방울의 차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정’에 빠진 걸까. 땀구멍이 모두 열렸다. 무수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다. 유럽 최초의 프로파일러이자 범죄심리학자로서 겪었던 수많은 사건과 범죄자들,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생각들이….

‘적은 너의 집 그늘 아래 있다’(수단의 속담)



‘악’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고 믿는 오류 속에서 태어난다. 저자는 강조한다. 범죄자라고 해서 “나는 세 사람을 죽였다”라는 ‘카인의 징표’를 이마에 새긴 건 아니라고. 악이 매우 멀리 존재한다고 믿는 것도 오류다. 살해당한 사람들은 (그가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라면) 대부분 가해자 이름을 댈 수 있을 정도라는 것.



‘그들’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 우리 옆집에 사는 평범한 이웃일 수도 있다. 3개국을 누비며 11명의 매춘 여성을 살해한 야크 운터베거는 기자로 위장해 사건 현장을 활보했다. 베른에서 11세와 19세 소녀를 칼로 찔렀던 범인은 스위스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스포츠 스타였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은 또 어떤가.



어떤 말을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더 결정적이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인성이 매일매일 모든 땀구멍에서 새어 나온다”고 말했다. 저자는 ‘그들’의 진정한 모습은 그들의 행동에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밝힌다. 말은 은폐하고 조작할 수 있지만 행동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욕망에 의해 조종된다고 한다. 특정한 욕망은 특정한 결정을 낳고, 그것은 주변 환경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 변화의 징표들을 확인해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많은 범죄행위나 행동방식들과 비교함으로써 그 사람의 욕망과 동기를 역으로 추리할 수 있다. 범죄심리학은 바로 이 같은 과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범인이 남긴 행동의 흔적을 면밀히 분석할 때 범죄자에 대한 진실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경험 안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저자는 말한다.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대체 내가 어떻게 아홉 살 먹은 아이의 머리를 곤죽이 되도록 내리치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다만 자신은 한 사람의 행동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 유사한 범행을 저질렀던 사람과 비교하고 그 속에서 범죄자의 욕망을 읽어내려 노력할 뿐이라고 덧붙인다.



그래도 그 어두운 세계를 살짝 들여다볼 수는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했다. 생사를 좌우하는 권력, 다른 사람의 무력함을 바라보는 권력, 완벽한 우월감은 그들에게서 늘 반복되는 욕망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정도 폭력적인 판타지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판타지가 점점 더 커지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로 발전해나갔다. 복잡한 성범죄를 범한 자들에게서 보이는 유사점도 비슷하다. 아이일 때 어머니를 학대하는 의붓아버지 등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 빠져들었고, 결국 판타지 속으로 도망쳤다. 이 폭력의 판타지가 평범한 섹슈얼리티와 결합하고 이것이 성범죄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왜 야수가 되는가.

그렇다면 한 개인을 야수의 모습으로 돌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소통의 부재’를 든다. 범죄자들은 합리적 의사소통 능력과 가능성이 결여됨에 따라 언제부터인가 의사소통을 중단하게 되고 그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되고 고조되는 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소통을 가로막는 원인 중 하나로 “숨가쁘게 빠른 우리 시대의 속도”를 지목한다. 우리 사회는 스스로의 욕망과 충족에 너무 탐닉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 권력과 지배와 통제를 열망하며 상대방의 굴종 속에서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킨다. 이로 인해 ‘버려지는 사람들’이 양산됐고 폭력적인 환상 속으로 도피하던 이들은 소통이 봉쇄되는 순간 야수로 급변한다.



저자는 묻는다. “우리는 매일 수천 가지 사건들, 사물들, 행동들을 관찰하지만 그에 대해 제대로 주목하고 있을까”라고. “너무도 성급하게 우리는 그를 ‘틀리고, 병적이고, 돌았고, 사이코패스다’라고 말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책은 연쇄살인범과의 만남이라는 액자 구조 속에 50여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들을 끼워넣었다. 유럽 최초의 프로파일러로서 저자가 걸어온 길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범죄 현장, 살인자들과의 면담, 야수를 키워내는 현대 사회에 대한 고찰 등이 촘촘히 얽혀져 있다. 혹 범죄심리학 개론서를 기대했다가는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심리 이론보다는 범죄심리학 분야를 개척해온 저자의 체험을 생생한 언어로 풀어낸 보고서이자 고백록이다. 무엇보다 범죄자에 대해 섣부른 판결을 내리기보다는 그들의 진정한 얼굴, 나아가 우리 자신의 맨 얼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통찰이 돋보인다. 김태희 옮김. 1만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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