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세상 밝히는, 따뜻한 ‘그림 한 등’ 내걸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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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9.01.19 09: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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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경북 문경의 한 암자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암자에 마련된 작은 다실은 한쪽 벽이 완전한 창문이라 병풍처럼 겹겹이 펼쳐진 소백산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차 한 모금에 산 한 번을 바라보며 평온감을 맛보고 있을 즈음, 또다른 한쪽 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다’였다. 산사에서 만난 잔잔한 바다. 바로 화가 오병욱의 그림이었다.

“그림은 나 혼자 그리지만 함께 보는 것…기운 주고 싶어”
산에서 바다를 보여준 그 화가는 ○○○ 전 잘 나가는 큐레이터였다. 강남의 갤러리 서미의 개관전 기획을 시작으로 3년 동안 큐레이터와 화랑가에선 ‘강남의 전설’로 통했던 사람이란다. 그런 그가 서울 생활을 모두 뒤로 한 채 지난 1990년 상주로 내려갔다. “도저히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어 ‘이러다가 그림을 못 그리게 되겠다’ 싶어서”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예술과 상업성 사이, 그림 그리는 이와 글 쓰는 이 사이에서 그의 꿈이 상처받은 탓이리라.

갑작스럽게 생계로 하던 일을 때려 치우고 시골, 그것도 군불을 때야 하는 촌 중의 촌으로 가자는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장면 배달도 안되고, 유치원 통학버스도 오지 않는 외지에서 아내는 참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소풍 가듯’ 살다보니 화가도 그의 아내도 어느새 시골 사람이 다 되어갔다.

그래도 서울에 올라갔다가 상주로 내려오는 길, 10차선 도로가 어느 새 4차선, 2차선으로 줄어들고 차 한대 겨우 들어올 정도의 좁은 길이 집 앞에 펼쳐질 때 “내가 너무 멀리 내려와서 사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당구 한게임 치고, 저녁엔 뭘 먹을까 고민하고 싶기도 한데 여기는 그런 것이 없잖아요”라며 그는 허허 웃었다.

전업 작가의 삶을 택하여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는 “그림은 혼자 그리는 것이지만, 함께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지인 한 분이 의사인데 매일 아픈 환자들과 씨름하다가 제 그림을 보면 다시 기운을 얻는다고 하더라”며 “그림으로 마음 한 구석의 불씨를 부채질해서 따뜻함을 일으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조심스레 ‘등불’ 이야기를 꺼냈다. “그림이 조금 더 긍정적으로 가려진 밝은 쪽을 비추는 등불이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사방에서 힘들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저처럼 안에 있는 것을 내보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등불을 내거는 심정으로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뭘로 등불을 밝힐 것인지, 어디다 등불을 들이댈지에 대해서 예술가의 입장에서 살펴 보고, 또 등불을 태울 연료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사회운동이나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시골로 파고들었지만 공동체와 사회를 보는 따뜻한 눈을 가진 그는 ‘그림으로’ 타인과의 소통을 꿈꾸고 있었다.

잘 나가던 큐레이터에서 귀농 화가로
-1990년 5월 강남 화랑가에서는 ‘전설적인’ 큐레이터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오기로 결심한 이유는 뭡니까.
“당시 갤러리 서미에 큐레이터로 있었습니다. 집사람이 임신한 상태였고 제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도 없이 놀고 있으면 속이 타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화랑으로 갔던 겁니다. 생활에 떠밀렸던 것이었죠. 큐레이터는 기본적으로 작가와 화랑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림 그리고 싶어서 미대에 갔고 그 꿈은 변함이 없었는데 큐레이터는 그림 그리는 게 아니라 소개하는 역할이니까 ‘이게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그림을 그릴 시간도 안됐고요. 직업상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 전시도 봐야 되고 하니까 ‘아 여기 오래 있다간 그림 못 그리게 되겠다’ 싶어서 고민고민하다가 내려오게 된 거죠.”

-요즘에는 정말 큐레이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훌륭한 큐레이터라고 이름이 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큐레이터는 일단 좋은 전시를 해야 합니다. 성격이 분명한 전시, 작가들이나 화단에 새로운 논란이나 이슈가 될 만한 전시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 이전까지 하지 않았던 일을 했습니다. 젊은 작가들로 개관전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주로 30~40대 안쪽으로 개관전을 하면서 반응이 좋았죠. 다른 화랑들에서 ‘저렇게도 하는구나’ ‘저 정도까지 작가의 연령이 내려온 개관전도 괜찮은데?’라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또 그때만 해도 저도 젊었고 약간의 글재간이 있어서 젊은, 새로운 평론가 또는 큐레이터로서의 참신한 시각이 있다고 평가를 받았죠. 거기에 화랑주인의 안목과 의욕이 만나니까 평가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갤러리 서미가 처음 문 열면서 강남에서 지명도가 높아졌죠.”

-그런 성과가 있었으면 큐레이터 일을 하는 것이 보람도 있었겠는데 그렇게 미련없이 접고 상주로 내려오게 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큐레이터의 일이라는 것이 미술 쪽에서 가장 섬세한 지적인 일부터 시작해서 몸을 써야 하는 노동 일까지 다 하는 거예요. 저는 전시가 시작되면 사다리에 올라가서 조명을 만지고 포장과 운송하는 일까지도 했었어요. 피카소 작품인데 대리석 작품을 옮기는데 고생했던 기억도 나네요. 그런데 제가 처음 큐레이터를 시작할 때는 그 직업이 별로 없었는데 몇년새 확 늘어났어요. 바둑에도 1급에서 9급이 있듯이 큐레이터라는 명함을 갖고 있지만 하는 일도, 성과도 천차만별이 됐어요. 너무 흔해지고 많아지니까 맥도 빠지더라고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큐레이터가 아무리 잘 해도 작품이 괜찮고 작가가 괜찮은 것이 먼저예요. 그런 작가와 작품이 나타나면 큐레이터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 고맙고, 그 분들을 모셔다가 전시하는 데에서 자신의 일에 의미를 찾고 보람을 느껴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당시의 고민은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느꼈던 것이라고 봐도 되겠네요.
“그렇죠. 제가 성격적으로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잘 못해요. 남들이 보기엔 굳이 그 멀리까지 내려가야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고요히 작업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어요. 화랑가는 사람이 막 와글와글 모이는 곳이 되다보니까 작업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본 거죠. 우리같이 공간을 만지는 사람들은요 개인 작업실이 있어야 하고 혼자 오롯이 작업을 해야하니까요. 그래서 내려오겠다고 결심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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