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토정 이지함은 개혁적 경제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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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12.29 0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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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평전…신병주 | 글항아리

신년이면 어김없이 찾는 <토정비결>의 저자. 점술에 능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지닌 특이한 인물. 야사나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기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1517~78)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은 이쯤에서 머문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신비주의의 베일’을 한꺼풀 벗겨보면 실상은 다르다. 이지함은 현실에 기반한 사상을 정립했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지함 평전>은 <토정비결>의 저자로만 알려지면서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이지함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한 책이다. 저자(건국대 교수·한국사)는 이지함 사후 편찬된 <토정유고>를 비롯,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 등의 자료들에 산재된 짧은 기록들을 재구성해내면서 ‘기인 이지함’을 ‘16세기 조선 사상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시켰다. 특히 자료의 한계를 돌파하고 이지함의 실체를 좀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스승 서경덕을 비롯해 조식, 이이 등 당대 지식인들과의 교유관계에 주목했다.

저자는 우선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가 아닌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을 들어 그의 저술이 아니라고 밝힌다. 다만 <토정비결>이 변혁 의지를 내포한 <주역>을 모태로 한 만큼 <주역>을 공부한 데다 민중지향적이었던 이지함의 사상과 통하는 측면이 많아 단순히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덧붙인다. 점술이나 관상비기에 능했던 이지함의 행적이 민중들에게 널리 전파되자 후대에 비결류의 책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가탁해 <토정비결>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책은 이지함이 당대 민중들에게 ‘슈퍼스타’였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한산 이씨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피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위치에 섰다. 생애 대부분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생활고를 목격하고 그 속에 뛰어들어가 백성을 위한 대책을 제시했다.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쳤으며 자급자족의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무인도에 박을 심어 곡물 수천 석과 교환해 빈민을 구제하기도 했다.

이지함의 학풍과 사상은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의(義)와 이(利)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성인도 원칙을 버리고 권도(權道) 즉 임시변통책을 펼 수 있다고 밝혔다. 국부의 증대와 민생에 유용한 것이라면 어떤 산업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해양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국제무역까지 주창했다. 책은 그의 혁신적인 사회경제 사상이 조선 후기 북학사상의 원류가 됨을 밝힌다. 이지함이 제시했던 부국과 해외통상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학자는 18세기 후반의 북학파 학자 박제가와 19세기 실학자 이규경이었다. 이처럼 이지함의 존재는 17세기 후반 이후 태동한 학문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 실학의 연원을 더 앞당길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또 이지함과 교유관계를 맺은 인물들을 통해 주자성리학 중심으로만 파악해온 16세기 조선 사상계를 좀더 폭넓고 다양하게 바라본다. 16세기는 ‘사화의 시대’였지만 ‘처사의 시대’이기도 했다. ‘사화’의 여파로 은거의 삶을 채택한 처사형 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만큼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16세기는 양명학이나 도교와 같은 사상전통이 널리 읽히면서 다양성과 개방성을 추구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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