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환율 걱정없으니, 토종내복만 따뜻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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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12.18 08: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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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내의브랜드 ‘무냐무냐’ 박칠구 사장

치솟는 달러, 하염없이 올라가는 금값, 중국 등 불안한 국제 경기, 추운 날씨. 남들에겐 재앙이자 고민들이 박칠구 사장(54)에겐 행운이자 호재이다. 박 사장은 ‘무냐무냐’란 브랜드의 내의를 만드는 내의전문 브랜드 지비스타일의 대표. 남들은 불경기로 월급도 제대로 못받고 심지어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쫓겨나는데 박 사장은 연말에 100% 특별 상여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그것도 빳빳한 새돈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회사를 지켜주고 열심히 일한 사원들에게 박 사장이 전하는 사랑이다.

“전년 대비 30~40% 매출이 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원들의 사기를 위해서입니다. 경기침체로 고생하는 분들께는 좀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요즘 금값이 엄청 올라서 아이들 백일이나 돌선물로 금반지를 못해주고 내의를 선물하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내의가 상하 한벌에 3만원 정도니까 부담도 없고 몇벌 있어도 괜찮으니까 선물용으로 많이 찾아요. 날씨가 춥고 에너지 절약을 위한 내복입기 캠페인도 우리 제품 판매에 도움이 되고, 디자인은 물론 모든 생산을 한국에서 하니까 달러 걱정 하지 않아도 되고….”

무냐무냐는 12월초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하루에 350만원 정도의 판매를 했다. 물론 럭셔리 명품 브랜드의 핸드백 1점 가격밖에 안되지만 1만원 미만의 팬티와 러닝셔츠를 300개씩이나 팔아서 올린 판매액이어서 박 사장은 마냥 감격스럽다. 하지만 박 사장이 늘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박 사장은 잘 나가는 중소기업인이 아니라 자살을 결심한 불운의 사업가였다.

“1997년 겨울, IMF가 터졌을 때 다들 폭탄맞은 듯 충격이 컸지만 전 경기악화뿐만이 아니라 배신감 때문에 죽고 싶었습니다.”
박칠구 사장의 아버지는 1963년 대구에서 ‘다보탑 메리야스’란 내의를 만들어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11남매중 7번째 아들로 이름도 칠구인 박 사장은 가업을 키우고 차별화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형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공든 ‘다보탑’이 무너졌다. 정성껏 키운 브랜드도, 열심히 저축한 돈도 정치판에 다 날아가고 박 사장은 서울에서 파란만장한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다. 배우고 아는 것이 속옷이어서 그는 형에게 500만원을 빌려 서울 동대문 흥인시장 한복판으로 올라온다. 다보탑 내의를 팔러 1호선 타고 수원, 안양 구석구석을 누볐지만 성과는 없었다. 하루에 2만원 정도 팔면 그나마 다행이고 늘 국수나 김밥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꼭 가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집념이 있으니까 고생도 고생으로 여겨지지 않았어요. 한 때는 경북지역에서 잘 나가는 의류업체 사장 아들이었고 유복하게 자랐는데 보따리 행상으로 전락했지만 열심히 사니 부끄럽진 않았습니다.”
동대문 상가에서 내의를 부지런히 만들던 그는 1993년, ‘디즈니’를 발견한다. 아이가 넋을 잃고 텔레비전을 보며 키득거리기에 화면을 보니 미키마우스가 등장하는 디즈니 프로그램이었다. 그의 머리에 번개가 번쩍였다. 아이들이 저토록 열광하고 친숙함을 느끼는 미키마우스를 속옷에 초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디즈니회사에 연락을 했다. 당시 디즈니가 국내에 상륙해 각종 라이선스를 판매할 무렵이었고 그는 국내 최초로 캐릭터를 도입한 속옷을 만든 주인공이 됐다. 미키와 곰돌이 푸우 등 아이들과 친근한 캐릭터가 들어간 내의는 날개돋친듯 팔렸다. 그는 공장을 확장하고 직원도 더 채용하며 사세를 키웠다. “미국 쥐 미키마우스야, 고맙다”며 절로 고개를 숙이던 1997년. 그는 디즈니 한국지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9월로 라이선스 계약을 끝내자는 전화였어요. 4000만원에서 시작해 35억원까지 라이선스 가격을 해마다 올려줬고 품질도 인정받아 호평을 받았는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죠. 알고보니 국내 내의전문 브랜드 ㅂ사에서 100억원이란 고가에 새로운 계약을 한 겁니다. 더욱 화가 나고 야속한 것은 바로 몇달 전에 미국, 홍콩 등에서 디즈니 캐릭터 관련 사업자들을 제주도에 모아 놓은 자리에서 우리 부부에게 항공권과 숙식권까지 제공하면서 성공 사례를 발표하게 했거든요. 디즈니란 원본이 있지만 캐릭터도 제가 개발했고 캐릭터 이미지를 손상시킨 것도 없는데 갑자기 해약 통고를 받으니 정말 미치겠더군요.”

IMF가 터져 가뜩이나 서민 경기가 침체될 무렵이라 그의 충격과 배신감은 더욱 컸다. 디즈니사에 폭탄을 던질까, 분신 항의라도 해볼까, 갖가지 상상을 하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강원도 낙산사로 갔다. 자신이 망하는 것은 견디겠는데 그동안 투자한 공장과 자재들은 물론 직원들을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저는 자살한 최진실씨가 이해됩니다. 자살이나 살인은 심사숙고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욱하는 충동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런데 자살을 결심하고 낙산사의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데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나 혼자 죽으면 그만이지만 저 사람들은 어쩌나 하는 생각에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그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죽겠다’는 소리는 절대 안합니다. 죽겠다고 생각하고, 죽겠다고 말하면 정말 죽고 싶어지니까요.”

절망과 억울함으로 실의에 빠진 그에게 아내는 이런 말을 했다.
“디즈니나 ㅂ사를 원망하지 말아요. 그래도 디즈니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돈도 벌고 내의나 캐릭터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잖아요. 디즈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합시다. 그리고 이젠 절대 빼앗기지 않을 우리 것을 만들면 되잖아요. 다시 새롭게 시작합시다.”
아내의 위로에 용기를 얻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규모를 축소해야 하기에 직원들을 내보내야 했던 것. 한 달 동안 직원들과 밥을 먹으면서 회사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회사가 다시 일어나면 꼭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우리만의 고유 브랜드와 캐릭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토종브랜드 무냐무냐. “뭐야뭐야”라고 물어보는 귀여운 아이들의 언어를 브랜드로 했다.

그리고 이제 10년이 흘렀다. 무냐무냐는 백화점에서 외제 캐릭터를 몰아낸 브랜드로 우뚝 성장했다. 현재 국내 백화점에 입점한 유일한 아동내의 브랜드이며 전국 600여개 속옷전문점과 50여개의 프랜차이즈점에서 팔리고 있다. 본사 직원 80여명에 협력업체 공장만 500여개이다. 그리고 중국은 물론 디즈니의 고향인 미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성공이 가장 위대한 복수’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10년 만에 통쾌하게 성공한 비결은 뭘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나 애니메이션의 인기 캐릭터 하나 없이, 그리고 잠옷의 경우에는 4만~5만원의 만만찮은 가격대인데도 고객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박 사장은 단호하게 ‘제품력’이라고 말한다.
“무냐무냐는 순수한 우리 브랜드이고 우리 기술의 자랑입니다. 당시 ㅂ사가 디즈니의 껍데기만 가져갔을 뿐, 우리 제품의 영혼은 가져가지 못했어요. 저는 아이들이 입는 옷이 그냥 옷이 아니라 아이들의 친구가 되길 바랍니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 할 시간과 대화가 부족한데 아이들의 꿈과 사랑을 담은 속옷을 입으면서 따스함을 느끼고 친구처럼 같이 놀고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본사 직원중 18명이 디자이너이다. 이들은 아이들이 입고 행복할 만한 친근하고 귀여운 디자인을 추구한다. 밤하늘이 보이는 창문이 새겨진 내의, 각종 꽃무늬와 야채, 과일이 담긴 속옷을 입으며 아이들은 “안녕, 고양이야. 이제 잠 잘 시간이다. 언니랑 같이 코~ 자자” 등의 동화를 스스로 지어낸다. 어린이의 꿈과 감성을 디자인에 담은 것이 성공 요인인 셈이다. 디자이너들은 1년에 2번씩 해외출장을 다녀오는 등 아이디어 개발에 열심이어서 연간 700개의 새로운 모델을 디자인한다.

디자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기능과 품질. 속옷이 친구면서 피부보호제란 개념을 담아 어린이 건강에 초점을 맞춘 기능성 제품들도 선보이고 있다. 모든 제품은 알레르기 예방을 위해 항진균 가공을 했고, 움직일 때마다 천연향이 나는 제품도 내놓았다.
“지금은 디즈니사에 감사해요. IMF 초기에 저를 쫓아내줘서 제가 한국형 브랜드를 개발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 무렵에도 달러가 2000원대로 올라 어쩌면 라이선스 비용으로 부도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서 제품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철저히 토종을 고집해 한국 공장에서 고급스럽고 충실한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칭찬도 받고 외환 변동에도 끄떡없으니까요.”

이젠 청담동에 사옥도 마련하고 올해부터 텔레비전 광고도 하지만 박 사장은 여전히 힘들다.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 그것도 제조업을 하는 것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금 동원이 쉽지 않아 기업 운영에 늘 허덕이고, 중소기업에는 우수한 인재가 모여들지 않아 안타깝다. 하지만 ‘영혼이 담긴 제품, 한국인의 손길이 빚어낸 제품’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서 우뚝 서고 싶다는 열정으로 그는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한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를 동반하기 때문에 좌절하면 기회의 끈조차 못잡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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