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동춘 서커스단 사라지면 공연예술 한 장르가 끊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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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12.15 08: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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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유랑인생 48년 박세환 단장
‘제니’는 서커스단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재산 목록 1호이자 가족이기도 했다. 잠시 동춘서커스단을 떠났다 돌아온 박세환 단장을 큰 코를 흔들며 맞아주던 것이 제니였다. 2년이 지났는데도 제니는 박 단장의 체취를 알아챘는지, 앞발을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재롱을 피워댔다. 배에 화상을 입었을 땐 박 단장이 직접 미국에서 가져온 약을 발라주고 주사도 놓아줬다. 말똥말똥 큰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1980년 어느날 난로가 실수로 꺼진 사이 영하 10도를 훨씬 밑도는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제니가 죽었다. 그 때 사람들은 박 단장에게 “인기 배우인 코끼리가 죽었으니 서커스단은 곧 망한다”며 서커스단을 해체할 것을 권유했다. 그때 서커스단을 접었어야 했을까. 미련스럽게도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땅에 파묻었던 제니가 눈에 아른거려서 박제까지 한 그였다. 제니처럼 서커스도 그에겐 아직은 접지 못할 무엇이다.

60년대 단원이 200여명에 이르는 전성기를 누리던 동춘서커스단은 현재 경영을 이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70년대엔 TV의 등장으로 볼거리가 늘어났고 80년대엔 건설 붐과 함께 야간업소 공연장이 생겨났다. 그래도 박 단장은 서커스를 계속 해왔다. “내가 손을 놓아버리면 연극, 쇼, 뮤지컬, 곡예, 국악 등이 어우러진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한 장르가 없어져요. 우리네 할머니가 리어카 타고 보러 오던, 함께 박수를 치면서 울고 웃으며 봤던 그 서커스가 없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그의 진단에 따르면 ‘서커스의 위기’는 변화의 물결을 잘 타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박 단장은 “서커스단은 해체되면 끝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단원 한 명이라도 더 월급 주기 위해서 마케팅이나 홍보·기획에 무심했지만 지금은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며 “내년부터는 조금 어렵더라도 전문 마케팅 기획자를 스카우트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태양의 서커스를 비롯해 요즘 공연의 대부분은 수많은 기업들이 몇 십억원씩 후원해서 이뤄진다”며 “서커스도 지금처럼 어떤 개인의 사업으로 이뤄질 수 없고 국가의 지원 또는 기업의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전히 유랑 공연을 하는 동춘서커스단에 겨울은 최악의 시즌이다. 날씨가 추워져 천막 공연이 쉽지 않고 관객도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 공연이 없는 동춘서커스단은 지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복권위원회 등의 후원을 받아 문화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전국의 여러 곳을 돌며 무료 공연을 펼치고 있다. 실내 공연이라 공중곡예 묘기나 동물쇼는 보여줄 수 없지만 서커스단으로선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달 20일 인천의 한 공연장에서 박 단장을 만났다.

- 요즘 서커스 공연은 어떻습니까.
“2006년 전국 순회공연 때 반응이 좋았습니다. 서커스는 우리나라에서 관객 동원을 제일 많이 하는 공연 중의 하나예요. 예술회관에서 공연하면 남녀노소가 다 모이고, 가족이 모이잖아요. 어디가도 관객이 많아요. 서커스에서 할 수 있는 종목이 아크로바틱, 비보이, 의자탑 쌓기 등 다 합하면 30가지 정도 됩니다. 모두 연출하면 7시간 정도 걸리는데 보통 2시간 공연에 16가지만 들어갑니다.”

- 서커스와 인연을 맺은 지 얼마나 되셨나요.
“제가 61년에 동춘서커스단에 입단했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였지요. 그 때는 동춘서커스가 연극, 쇼, 국악, 창, 마술 등이 모두 망라된 종합 엔터테인먼트였어요. 동춘서커스가 최고였지요. 당시 이봉조 선생을 비롯해서 서영춘 선배, 백금녀, 황해, 남철, 이주일씨 등 유명한 사람들이 많았고 시시한 사람들은 못 들어왔어요. 탤런트 장항선씨가 동기예요.”

- 왜 서커스단을 찾아가셨나요.
“제 꿈이 배우와 가수였어요. 지방에서 노래도 제법 잘했지요. 서울에 와서 그런 것을 배우고 싶은데 학원도 제대로 없고 대학의 연극영화과도 귀했어요. 더구나 그 때는 연극하고 노래부른다고 하면 ‘쟁이’니까 잘 안하려고 했었고요. 그래서 수소문한 것이 서커스예요. 당시엔 18개 극단이 있었고 서커스가 우리나라 대중 예술의 중추적, 주도적 역할을 했어요. 극장도 없지 연극단도 없지 결국 서커스 안에서 연극하고 쇼하고 마술하고 국악을 했지요.”

- 배우나 가수를 ‘쟁이’라고 할 정도로 보수적인 때였는데 서커스단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집에서 반대는 없었나요.
“집안에 얘기도 못했죠. 제 집이 경주예요. 박혁거세 왕릉을 우리집에서 관리했고 할아버지께서 밀양 박씨 종친회 부회장이었어요. 성균관대학교 이사에 대구대학교 이사, 그리고 2대 국회의원도 하셨죠. 그런 가문에 제가 종손이에요. 큰집의 큰아들이죠. 고등학교 다닐 때 트럼펫도 좀 불고 음악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러면서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수소문한 것이 동춘서커스단이었어요. 집에는 말도 못했죠.”

- 처음 서커스단에 들어가서는 무슨 일을 했나요.
“단원으로 들어가면 심부름부터 시작합니다. 한 2개월 동안 심부름을 하니까 공연이 끝나고 손님이 20~30명밖에 없을 때 무대에서 노래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라고 시작하는 ‘청춘의 꿈’이라는 노래를 했는데 무대 밑에서 혼자 연습할 때는 잘했는데 막상 유료 관객을 두고 조명을 받으니까 손발이 덜덜덜 떨리는 것이 악사의 음악 전주도 안들리더라고요. 노래가 폴카인데 완전히 트로트가 되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기억이 있어요.”

- 그렇게 서커스단 생활이 시작됐군요.
“그렇죠. 남철씨가 많이 도와줬어요. 저한테 진행을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요즘으로 치면 MC처럼 사회자가 멘트를 잘하고 잘 웃기는 것은 두번째이고 당시엔 귀공자 스타일이 인기였어요. 제 자랑같지만 20세 안팎일 때는 저도 미남이었습니다, 허허허. 특히 저는 경상도 사람이라 발음을 연습하느라고 책을 엄청나게 밤을 새워가면서 읽었어요. 지방공연에서는 라디오도 없어서 동네 라디오 있는 곳으로 뛰어가서 12시에 송해 아저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받아 적고, 적어 놓은 글 위에 밑줄을 그어가면서 혼자 우물우물 읽고 연습했어요. 그러던 중 유명한 전속 사회자가 다른 곳으로 스카우트 되는 바람에 입단 2년 만에 무대에 올랐죠. 또 당시 서커스에서는 30~40분짜리 신파 연극을 했는데 <불효자는 웁니다>의 원작인 <어머니 울지마세요>라는 연극에서 주연 배우를 하게 됐어요. 프롬프터가 돌아가면 뒤에서 촛불 켜고 ‘아, 어머니. 길을 막아놓고 물어보세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있습니까’라는 대사를 읊었던 기억이 납니다. 3년 만에 핵심 멤버가 됐지요. 그때는 다른 사람들이 놀러 다닐 때에도 열심히 했어요. 밤잠 안 자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망한 배우 후보생이라고 했었어요.”

- 그 이후 서커스가 전체적으로 하향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60년대까지는 좋았지요. 일반 쇼도 있었지만 도시 몇 군데 돌고 가면 쇼 자체가 끝나버리니까 결국 서커스단으로 돌아와야 했죠. 서커스가 대중예술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어요. 저도 62년인가 63년에 MBC에 가서 오디션 봤어요. 그런데 당시엔 TV가 상당히 안 좋았어요. 신성일씨 등 주연급 배우 아니면 C클래스로 낙인찍혀 단역만 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안 가고 서커스단에 남았습니다. 여기서 공부하고 후라이보이 2세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70년대 TV가 생기면서 다 나갔어요. 70년대 새마을운동 하잖아요. 낮에 새마을 사업하고 나서는, 밤에 서커스보러 와야 하는데 TV를 보는 거예요. 당시 74년 2월인가 3월에 KBS 드라마 <여로>가 워낙 인기가 있었어요. 우리 서커스 단원들도 <여로>를 보러 가버릴 정도였죠. 80~90년대에는 건설 붐이 일면서 빠졌고 야간업소로도 많이 나갔죠. 그런데 주연급 배우가 나가면 서커스단 자체가 문을 닫아야 하니까 저는 끝까지 남아 있었죠. 결국 동춘에 남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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