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도시 행간에 깃든 ‘문화 향기’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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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12.12 09:04:20
  • 조회: 11388
ㆍ책방ㆍ화랑 달라진 ‘청와대 가는길’
청와대로 가는 길에 통의동이란 동네가 있다. 이 지역엔 골목 입구마다 경찰들이 서있다. 죄지은 일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불편해지는 곳이다. 오랜 세월 권력의 기세에 눌려 산 탓일까. 통의동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숨죽이고 있는 동네다. 서울 한가운데에 있지만 외지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통의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최근 1~2년 사이 이 조용한 동네에 변화가 일고 있다. 건축가와 화가, 사진작가 등 문화·예술인들이 통의동으로 모여들고 있다. 이들은 여기서 건물을 올리고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연다. 지금도 새로 문을 열 화랑 공사가 곳곳에서 한창이다. 과거 인사동과 삼청동이 누렸던 문화·예술 거리의 지위를 통의동이 물려받는 모양새다. 통의동에 둥지를 튼 문화·예술인들은 “통의동만은 삼청동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소비 문화와 자본에 밀려 인사동·삼청동을 떠난 사람들은 이 작은 동네가 자신들의 마지막 아지트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문화·예술마을로 변신하는 통의동
한때 낭만의 대명사였던 삼청동은 더 이상 고즈넉하지 않다. 못 보던 음식점과 카페가 바쁘게 들어선다. 주말이면 몰려드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다. 삼청동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삼청동의 고요를 사랑했던 미술인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사동을 떠났을 때처럼 이제 삼청동도 관광객들에게 양보해야 하는 것일까. 삼청동을 내주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이들이 찾아낸 대안이 경복궁의 서편, 통의동이다. 통의동은 경복궁의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과 마주보고 있는 동네다. 이 지역은 삼청동이나 가회동, 소격동처럼 화려하지 않다. 눈길을 끄는 큰 기와집이 없고, 사진에 담고 싶은 돌담도 경복궁 담을 제외하면 없다. ‘인사동 지구단위계획’ ‘북촌가꾸기 사업’처럼 서울시가 벌이는 각종 보존 사업에도 포함된 적이 없다.

서울시가 굳이 ‘보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통의동은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궁의 동편과 달리 소란스럽지 않다는 통의동의 매력은 예술가들을 끌어들이기 충분했다. 이들은 통의동과 창성동을 나누는 영추문길을 중심으로 갤러리와 독특한 카페, 책방을 열었다. 주민들 외엔 유동 인구가 거의 없던 이곳에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3월 문을 연 가구 카페 ‘mk2’의 주인 이종명씨도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사진 작가인 이씨의 작업실은 본래 북촌길 정독도서관 앞에 있었다. 삼청동에서 가회동으로 이어지는 지점, 그러니까 맛집을 찾아다니는 미식가들과 카메라를 든 출사족들이 성지 순례하듯 휩쓸고 지나가는 그 길이다. 작업실 주변은 복잡했다. 주말엔 사람들에게 떼밀려 다녀야 했다. 한적한 곳으로 이사하고 싶었다.

그는 통의동에 작은 가게를 열고 평소 수집했던 빈티지 가구 몇 점을 진열했다. 들어와서 구경하고 마음에 들면 사가라는 뜻이었다. 가구만 내보이는 게 싱거워 커피도 팔았다. 손님들은 진열된 가구에 앉아 차를 마신다. 가구가 팔리면 자연스레 카페 인테리어도 바뀐다. 이씨는 “커피만 마시고 가는 카페가 아니라 미술·문화계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작당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커피 팔아 돈 벌기 위해 카페를 연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것이 통의동 카페의 특징이다. 단순히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대안공간 ‘브레인 팩토리’ 옆에 있는 카페 ‘FAN’은 건물과 인테리어 자체가 작품이다. 본업이 큐레이터, 회화 작가, 설치 작가 등인 사장 4명이 설계부터 인테리어, 마감 공사까지 직접 했다. 간판과 창문, 그릇, 조명 등은 동료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채웠다. 카페 ‘고희’도 갤러리와 카페의 기능을 겸하는 곳이다.

“자본의 관심은 반갑지 않다”
통의동은 예술인 공동체의 새로운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책방 ‘가가린’이다. 가가린은 회원들이 중고 서적을 맡기면 이를 대신 팔아주는 위탁 헌책방이다. 가가린은 장소만 제공할 뿐, 헌책에 값을 매겨 책방에 내놓는 것은 회원들이 직접 한다. 이 때문에 같은 책인데도 가격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주인이 미리 책값을 치르고 헌책을 대량 수집·판매하는 중고 서점과는 운영 방식이 다르다. 이 독특한 책방엔 주인이 따로 없다. 가가린은 영추문길 이웃사촌인 mk2와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 갤러리 ‘팩토리’, 건축가 서승모씨가 공동 출자해 세운 책방이다. 이들이 손잡게 된 데는 절박한 사연이 있었다.

어느날 대형 음식점이 영추문길의 빈 점포 한 곳과 임대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통의동에 자본이 들어오는구나. 이것은 통의동의 삼청동화(化)를 예고하는 신호탄 같은 사건이었다. 통의동마저 망가지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또 다른 빈 공간이 나오자마자 이들은 각각 수백만원씩 돈을 모아 그곳을 덜컥 빌려버렸다. “책을 내놓고 팔면 재미있지 않을까?”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고 지난 여름 그 자리는 책방이 됐다.

가가린은 그 흔한 인터넷 웹사이트 하나 없다. 모든 가입·판매 절차가 오프라인에서 이뤄진다. 회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직접 가가린에 찾아가 종이로 된 가입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어떤 책이 있는지 컴퓨터로 검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데이터베이스를 따로 만들지 않아서다. 아날로그가 주는 나름의 매력 때문일까. 회원 수가 어느새 200여명에 달한다. 단골 중엔 출자자의 지인들도 있지만 동네 주민들도 많다. 예술인들의 공동 작업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 속으로 녹아든 것이다. 워크룸의 그래픽 디자이너 김형진씨는 “워크룸과 mk2는 이 근처에 계신 분들과 주로 작업하거나 동네 주민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지역 기반화됐다”며 “동네 찻집, 동네 디자인 스튜디오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주민들과 접점을 넓히며 골목과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젊은 예술인들이 통의동에서 재미나게 산다는 소문은 이미 ‘업계’에 파다한 듯하다. 새 식구들이 이사올 채비를 하고 있다. 화랑 신축 공사가 여기저기서 진행 중이다. 카페 고희 뒤편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냈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가 미술관을 짓고 있다.

전시회를 열려는 작가들도 통의동 화랑을 선호하는 추세다. 갤러리 팩토리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는 작가 권혁씨는 “예전엔 이 근처에 올 일이 없었다”면서 “최근 갤러리들이 이곳에 모이고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면서 작가들 사이에 통의동이 점점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통의동 사람들은 이곳이 삼청동처럼 급속도로 달라지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청와대 코 밑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고, 골목이 길게 이어지는 곳이 없어 거대 상권이 형성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종명씨는 “삼청동처럼 변질돼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뜬다’는 동네엔 자본도 관심을 보이게 되어있다. 지금 통의동에는 대기업이 레스토랑을 열기 위해 자리 몇군데를 사놓았다는 풍문이 돈다. 이태원의 유명한 식당 주인도 점포를 계약하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형진씨는 “구멍가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누군가 건물을 짓고 있더라”며 “조만간 임대료가 큰 폭으로 상승해 우리도 쫓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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