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겨우 이름석자 그리는데 무슨 간첩질 하겠소, 40년간 고통으로만 살았네요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11.24 09:16:57
  • 조회: 362
ㆍ재심서 무죄선고 누명 벗은 납북어부 서창덕씨
60여년을 참으로 힘들게 살아냈다. 1947년에 태어난 소년은 어렸을 적부터 가난에 짓눌렸다. 국민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겨우 이름 석 자 그릴 정도이던 열네 살 때 처음으로 남의 배에 올랐다. 열아홉이 되던 67년 조기 잡이를 나갔다가 납북됐다. 남한으로 돌아와보니 청년은 ‘간첩’이 돼 있었다. 주홍글씨가 새겨진 그의 몸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고 가족들과는 생이별을 했다.

주위의 수군거림에 위축되어 작은 세계에 갇혀 살면서도 어렵게 가정을 꾸리고 행복을 맛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납북된 지 17년 만에 간첩의 망령은 보안대라는 이름표를 달고 그를 다시 찾아왔다. 고문을 당했고 7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수사기관은 보안관찰법이라는 미명 아래 계속해서 그를 감시했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곤 배타는 것밖에 없던 그는 인력시장에 나가 막노동 일거리를 얻는 것조차 힘들었다. 길거리의 고물을 줍는 것까지도 감시를 당했다.

서창덕씨는 “개야도에 다시는 안 들어간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개야도는 고향이면서도 ‘물이나 알고 고기나 알던’ 어부의 삶에 간첩 꼬리표를 달아준 곳이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 듯했다. 그래도 그는 “바다야 나무랄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

지어내기도 힘들 것 같은 사연의 주인공은 전북 군산 개야도 출신의 납북어부 서창덕씨(63)다. 지난달 31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의 재심을 통해 서씨는 ‘간첩’이 아니라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렸던 그 순간에도 ‘무죄’라는 판사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없었다. 그의 귀는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판사가 “무죄, 무죄, 무죄”라고 세번을 외치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렸다. “고통으로만 고통으로만 살았다”던 서씨는 “날개는 없지만 날아가고 싶은 기분”이라고 했다. 가족 생각이 많이 나고 ‘간첩 아버지를 둔 적 없다’고 아버지를 등졌던 아들을 다시 찾고 싶다고도 했다.

긴 세월을 간첩으로 낙인찍은, 고통을 가한 국가와 보안대 사람들이 밉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솔직히 (감옥에서) 나올 때는 미워하는 마음이 많았지요”라면서도 “지금 와서는 서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미워하면 뭐하겠어요”라고 말했다. 노인은 지긋지긋하고 무서워서 고향인 개야도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지만 “바다야 나무랄 수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이제 서씨의 남은 바람은 자신과 같이 간첩으로 몰린 납북 어부들이 모두 누명을 벗는 것이다. “나처럼 억울하게 당한 많은 사람들이 무죄를 받게꼬롬 해줬으면 좋겠어요. 훌훌 다 벗고.”

-개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나요.
“부모님도 개야도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고, 저도 거기서 태어나서 살았어요. 어머니는 배가 뒤집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우리 먹여 살리려 조업하다가 바다에서 떨어져 돌아가셨어요. 형님은 내가 어렸을 적에 군대에 갔고요. 벌어먹을 길이 없으니 그렁께 학교도 다니다 말았지. 남의 배를 타기 시작한 것이 열네살 때부터였지요. 배를 타면 돈도 제대로 못받아요. 우리는 어리다고 남들 100원 받으면 50원도 채 못받았어요. 먹고 살려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밥 해주고 남으면 그놈들 가져다가 동생들 먹이고 그랬어요.(울음) 월급도 못받고 인자 거기서 생각해서 주면 쌀이나 보리 사서 동생들 먹여 살리고 그랬지요.”

-67년 5월 연평도에 고기를 잡으러 나가셨다가 납북됐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어땠나요?
“열아홉살이 되니까 그때부터 어른 품삯을 주기 시작했어요. 열아홉 되던 바로 그해가 67년이었는데 안강망 승룡호에 올랐죠. 처음으로 승룡호를 탄 날이었어요. 바로 그날 납북됐어요. 처음으로 그 배를 타자마자 납북됐어요. 5월 달이면 한창 조기철인디 몰려오는 조기떼를 잡으려고 연평도까지 갔지요. 안개가 잔뜩 끼었는데 이북 놈들이 넘어와서 우리를 강제로 끌어간 거예요. 그때는 그런 게 많았어요. 200척씩 체포해가고 그랬어요. 동해안 서해안할 것 없이.”

-납북되고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124일인가? 3~4개월 있었응께. 북에 가니까 인자 집에도 못가고 죽는가보다 해서 말도 못하게 울고불고 그랬지요. 대동강이다 어디다 해서 강제로 관광시켜준거 따라다니는 것밖에 없어요. 단체행동 했으니까요.”

-3개월여 만에 다시 돌아와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 별 무리가 없었습니까.
“아이고. 인천에 돌아오니까 인천경찰서에서 조사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군산으로 오니까 군산경찰서에서 또 조사를 받았지요. 싹 다 얘기했지요. 그리고 기소유예로 풀려났어요. 집에선 내 아들 살아돌아왔다고 말도 못하죠. 승룡호 선원들이 다 살아 돌아왔으니까요. 다시 남의 배 타면서 생계유지를 했어요. 연평도 가는 배는 아예 타덜 안했어요. 그런데 69년도에 갑자기 어느 날에 다시 잡아다 고문을 하더라고요. 간첩행위를 했다는 거예요. 국민학교도 못 나온 우리가 간첩행위가 뭔지나 알아야 간첩을 하지요. 한달동안 가둬놓고 고문을 했고 반공법 걸어가지고 재판 받았어요. 그래서 거기서 2~3년 집행유예 받고 나왔어요. 이때부터 조심조심 살았어요. 그런 일 또 당할까 싶어가지고. 어디 가서 말도 잘 안하고 돌아다니지도 않고 그렁께 친구가 없지요. 남들하고는 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피하고 그랬지요.”

-납북됐다 풀려난 이후에 개야도에서 나와서 군산으로 오신 거군요.
“네. 나는 개야도는 쳐다 보기도 싫어서 군산 나와서 살았어요. 죽어도 다시 안 들어가요. 거기 어머님, 아버님 무덤도 있지만서도. 배타는 것도 어려워지더라고요. 이북 갔다왔다고요. 그래서 이 배 저 배 타야지 안 그러면 절대 배를 안태워줘요. 서슬이 퍼런 시절 5공때인데 까딱하면 잡아넣고, 잡아넣고 할 때인데 말도 못했지요. 그래도 그렇게라도 다녀야 돈이라도 한 푼 벌어먹지. 어쩌다가 나가려고 하면 입·출항 신고해야 하지 않아요? 그렁께 경찰관이 배까지 다 와요. 그렇게 세상을 이렇게 묶어 놓고, 감금시켜놓고 산 거예요.”

-그렇다면 가족들과 연락은 하셨나요.
“간첩소리 듣고는 여태까지 40여년 동안 연락이 어디가 있어요. 그래도 착실하게 사니까 누가 중신을 서줘서 처녀는 생각도 못하고 아이가 셋 딸린 여자를 소개 받았어요. 장모님도 같이 여섯 명이 살기 시작했지요. 거기서 아들 하나 낳았어요. 진석이라고. 남의 애들이고 장모까지 모시고 살았지만 참 좋았어요. 나름대로 행복했지요. 먹고 살려고 노력했고 착실하게 했지요. 나는 배타고 안식구가 철근 엮으러 다니고.”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