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아/교육] “교과서 수정안, 학생위한 교육적 고뇌 없이 정치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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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11.17 08:5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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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정부 교과서 수정 권고에 이의 전국역사교사모임 윤종배 회장
할아버지·할머니의 제삿날이 음력 몇월 며칠인지는 어느 순간 가물가물해지더라도 초·중등학교에서 배웠던 교과서의 인상적인 대목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소녀의 가슴속에 파고든 교과서의 구절구절은 이들이 성년이 지나 중년·노년에 이르더라도 또렷이 남아 숨쉬게 된다. 매년 가을이 되면 일석 이희승(一石 李熙昇)의 명수필 <청추수제(淸秋數題)>의 그윽한 글귀나, 독일 작가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나오는 ‘초추(初秋)의 양광(陽光)’ 따위의 물기어린 문장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도 전적으로 교과서의 덕택일 터이다. 그뿐인가. 생활인으로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면서도 때때로 시성(詩聖) 두보의 <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이나 <빈교행(貧交行)> 등의 당시(唐詩)를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교양인의 흉내를 낼 수 있는 것도 고교 교과서에서 <두시언해(杜詩諺解)>를 배웠기 때문이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이 땅의 역대 독재정권이 교과서를 통해 체제 홍보와 상징 조작을 일삼았던 것도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이 같은 힘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파시스트 나치체제나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이른바 ‘좌편향’ 주장이 제기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6종에 대해 ‘수정권고’를 내렸다. 뉴라이트계열 교과서포럼 등의 단체에 의해 좌편향으로 지목된 금성출판사 등 6종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내용 253개 항목 가운데 102건은 집필진 자유로 고치고, 55건에 대해서는 수정권고를 내린 것이다. 대통령과 장관까지 나서서 ‘좌편향 교과서’ 운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온 이번 조처를 통해 정부는 교과서를 사전검열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 셈이다. 정부는 문제가 된 내용들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선 학교에서 역사를 담당하는 교사들은 이번 교과서 수정작업이 ‘교육적 차원이 아니라 너무나 정치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전국의 역사담당 교사 2000명이 회원으로 있는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윤종배 회장(서울 온곡중 교사)을 그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만났다. 윤종배는 교사 몇명이 남아 있는 저녁 무렵 교무실에서 역사교과서와 참고서를 책상 위에 쌓아놓고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윤종배는 “정부의 이번 교과서 수정 작업은 학생들을 위한 교육적 고뇌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철저히 정치적인 결정”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정부가 학생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이나 일선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형식적으로라도 문의를 했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가 뉴라이트 계열의 몇몇 관변 정치학자, 경제학자들의 말만 듣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짓을 했다”고 말했다.

‘좌편향’ 운운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윤종배는 지적했다. 그는 “이른바 ‘뉴 라이트’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자신들이 맨 오른쪽에 있는 줄 모르고 교과서를 바라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들도 모조리 좌편향으로 보이는 것”이라며 “정부는 검정교과서에 대한 전무후무한 사전 검열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종배는 교과서 수정 작업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이명박 정권이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나왔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은 실용을 내세워 출범한 이래 어느 하나 제대로 정치적이나 정책적 성과도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데다, 특히 촛불정국 등으로 인해 지지기반이 급속하게 붕괴되면서 위기감을 느끼자 반대 진영을 억압하고 자기편을 끌어안을 수 있는 양수겸장의 수단으로 교과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 이번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까닭은 정권이 자신의 정치적 입맛에 따라 교과서를 뜯어 고칠 수 있는 나쁜 예를 남겼기 때문이다. 윤종배는 “앞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를 손보기 시작하면 교과서는 그야말로 정치적 누더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종배는 “교과부가 제시한 수정안을 살펴보면 정부·여당이 입만 열면 떠들었던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저해했다’ ‘민족적 자긍심을 훼손했다’ 운운이 크게 과장됐거나 사실을 왜곡했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행 교과서가 진실로 국가의 정통성을 저해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훼손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것이라면 문제가 된 대목을 모조리 뜯어고쳐야 하는데도 “따옴표를 겹따옴표로 고쳐라” “ ‘결국’이란 표현을 빼라” 등으로 ‘경미한 첨삭지도’에 그친 것은 교과서에 손 볼 대목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라는 것이다. 윤종배는 “교과서 수정은 결국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를 본질적인 문제처럼 몰고가면서 색깔론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부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초 뉴라이트 단체나 정부가 문제를 삼았던 대목은 분단정부 수립에 대한 이승만의 책임과 한국전쟁 때의 북한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는 등 북한을 미화한 것, 경제성장의 업적을 충분히 기술하지 않은 것 등이다. 교과서의 이런 대목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긍심을 훼손·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현행 교과서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꿰어맞춘 데서 비롯됐다고 윤종배는 지적했다. 예컨대 한국전쟁을 서술하는 맨 첫머리에 “전쟁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됐다”고 못박고 있다는 것이다. 윤종배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이승만의 정당성은 다르다”면서 “이승만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연결시키는 발상은 한 마디로 무지”라고 말했다. ‘북한 미화’에 대해서도 윤종배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과서 350쪽 가운데 북한을 서술한 것은 20쪽에 불과한데도 뉴라이트나 이명박 정부가 문제를 삼고 있는 것에 대해 “북한을 총체적으로 실패한 집단으로 더욱 적나라하고 신랄하고 강렬하게 공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윤종배는 “모든 역사에는 아프고 안타까운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면서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까닭은 이 같은 아픔과 안타까움을 잘 살펴서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교훈으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에는 빛과 그늘이 함께 존재하게 마련인데 이번의 교과서 수정은 그늘을 모조리 치워 없애버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격이라는 것이다. 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늘을 치워버린다고 갑자기 정통성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사를 국정교과서로 만든 것이 박정희 유신정권 때인 1974년 5차 교과서 발행을 통해서인데 그때도 ‘정통성’과 ‘정체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윤종배는 “독재의 그늘이 짙을 때 정통성과 정체성이 강조되는 일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면서 “정통성과 정체성은 아끼고 신중히 사용해야 할 말인데 너무 손쉽고 안이하게 이 말을 들먹이고 있다”고 말했다.
윤종배는 이번 교과서 수정 파동으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 정부가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교과서가 바뀌면 대입수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에 대해 이들은 적잖은 혼란을 겪었으며 무엇보다 대한민국이 교과서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나라인가라는 자조에서 오는 불신감이 위정자나 교사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을 겨냥해 대학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일선학교의 역사교사들은 다양한 대응책을 세워놓고 있다. 이미 역사학자들이 교과서 수정을 비판하는 1차 선언을 했으며, 오는 20일 역사학계와 교육계는 물론 관련 시민사회단체들까지 참여하는 ‘역사교과서를 위한 열린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윤종배는 “토론회에서는 이번 교과서 수정 파동의 전말을 꼼꼼하게 되짚어보고 검정교과서의 근본적인 개선 방향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종배가 회장으로 있는 전국역사교사모임은 올바른 역사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역사교사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서 민주화 열기가 한창이던 1988년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다양한 역사교육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결성됐다. 이 모임은 역사교육 전문계간지인 <역사교육>을 발행하는 한편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등 대안교과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윤종배는 “주위의 추천과 권고로 올해 1월 회장 자리를 맡게 됐다”고 말했다.

윤종배가 생각하는 교과서는 “성전(聖典)이 아닌 학습안내서”이다. 기성사회는 교과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보는 측면이 있지만 교과서는 아이들의 토론을 유도하고 왕성한 발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수업의 중요한 매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교과서는 교과서로 봐야 하고 그 나름의 구조와 교육과정을 교육적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윤종배가 생각하는 역사는 ‘기출(旣出)문제)’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갈등을 겪고, 한계를 노출하며,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충돌하는데 지금의 이 문제를 과거에는 어떻게 풀었을까를 살펴보면 유익하고 의미있는 교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윤종배는 “역사는 결국 인간과 사회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인문학의 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기출문제’를 잘 살펴보면 현재의 ‘응용문제’도 잘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학도들에게는 잘 알려진 격언이라면서 “과거를 돌아보면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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