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빨간딱지맨’ 기원섭 “딱한 사람 하도 많아 속으로 많이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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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11.10 09: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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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부인에게도 ‘딱지 붙여달라’ 수입 늘수록 슬퍼지는게 우리직업”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직업관이어야 할 검찰 수사관과 법원 집행관. 검찰 수사관 생활 31년9개월을 거쳐 서울중앙지법에서 집행관으로 일하는 기원섭씨(60)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직업이나 터프한 외모와 달리, 동료와 지인들로부터 따스한 정과 눈물이 많다는 얘기를 듣는다. 피의자들과 채무자들이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실적과 수익이 올라가지만 그는 속으로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단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한화갑 민주당 전 대표의 구속집행 담당 수사관으로 역사 현장에 있어 유명세를 타기도 했던 그는 최근엔 자신의 인터넷 카페에 ‘집행관 일지’란 이름으로 체험담을 올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의 고뇌와 애환을 진솔하게 전하고 있다. 극심한 불경기로 서울 강남의 고액아파트들까지 줄줄이 경매에 넘어가고 아이의 자전거에도 빨간딱지가 붙여지는 요즘, 집행관인 기원섭씨를 통해 2008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들어봤다. 그는 “수사관은 검사를 보좌하는 일이며 집행관 역시 밖으로 드러나면 안되지만 검찰 수사관이건 법원 집행관이건 ‘설득과 설복’을 통한 인간애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며 입을 열었다.

집행관은 마음으로 운다

-요즘 IMF 때보다 더 경제상황이 어렵습니다. 집행관은 이럴 때가 더 돈을 잘 벌지 않나요.
“집행관이란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가 있을 때 할 일이 생기는 사람들이고, 그 집행사건의 의뢰인인 채권자로부터 받는 수수료가 그 수입의 원천이 됩니다. 시중 경제사정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재미를 보는 집단’이 바로 저 같은 집행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최근 하강국면을 계속해온 경기로 봐선 당연히 돈을 벌었어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질 못합니다. 경기는 나빠도 별로 움직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매의 경우 계속 유찰되는 경우가 많아 매물이 있어도 집행은 썩 많지 않고요.”

-드라마를 보면 가난하고 억울한 주인공 집에 법원 집행관이 구둣발로 집에 쳐들어와 살림살이에 차압 딱지를 척척 붙여 대는 장면이 많습니다. 채무자들이 울며불며 애원해도 아랑곳 않고 가재도구를 밖으로 끄집어 내는 냉혹한 사람들로 비쳐지는데….
“채무자 측에선 당연히 그렇게 보이겠죠. 합법적으로 법원의 판결을 받은 일이니 냉정하게 집행하면 그만이지만 집행관들도 인간이라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머리 속으로는 수입을 계산할지 모르지만 마음 속으로는 안타까워 자리를 피하고 싶거나 눈물을 감추려고 더욱 표정이 굳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병든 어르신들이나 어린이가 있는 집에 갔을 때는 채권자들에게 ‘조금 더 기다려보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지난 달에도 임대주택 명도집행을 하러 갔는데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 집에 사는 예순 다섯살 할머니의 가재도구를 들어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파 울었습니다. 마흔살 아들의 카드빚을 대신 덮어 쓴 어머니가 임대아파트 임대료를 못내 병들어 누워있다가 쫓겨나게 된 건데 아들이 뭐했나 화도 나고 적어도 임대아파트 보증금은 법으로도 보호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답답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는데 사람 기척이 없어요. 안에서 문을 안 열어주면 자물통을 강제로 따게 돼 있거든요. 문을 따려고 하는데 안에서 딸까닥 소리가 납디다. 문을 열고 보니 암에 걸려 머리를 빡빡 깎은 여자가 저 안에서 기어오고 있어요. 문은 열어야 되겠는데, 힘이 없으니 주저앉아 그렇게 힘들여 기어오고 있는 거예요. 집행관은 뭐 인간이 아닌 기계라서 눈물 안 납니까.”

-채권자가 억울한 경우도 있을 텐데요.
“그럼요. 20년 동안 남의 땅을 무단 점유해 무허가로 집짓고 가게도 열어 자식들까지 결혼시킨 사람이 땅주인이 그 땅에 집을 지으려 하자 ‘오래 살았으니 내 땅이나 마찬가지다, 거액의 이사 비용을 내라’고 억지주장을 해 합의가 이뤄지지 않다가 결국 강제철거됐는데 20년 동안 채권자도 마음고생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재미있는 사건도 있어요. 한 부인이 약간 부실한 남편이 운영하는 공장의 공장장과 정을 통하다 들켜 결국 이혼했는데 부인이 남편에게 위자료 5000만원을 주라고 판결 받았습니다. 판결을 받고도 미리 재산을 빼돌려 도망간 부인과 공장장이 돈을 한푼도 주지 않아 부인과 재산까지 잃은 남편이 두 사람을 5년간 찾아 헤매다 거의 폐인이 된 지경에 발견, 그 살림살이에 대한 압류신청을 해온 겁니다. 한참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에 ‘빨간딱지’로 불리는 압류표목을 붙이고 있는데 동행했던 채권자인 남편이 ‘저기도 붙여 주세요’라고 말하더군요. 그 사람이 오른손 검지로 지목한 것은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이젠 위자료 채무자가 된 부인이었어요. 의아해서 다시 확인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기라니까요. 저거 원래 내거였거든요’… 웃을 수도 없고 화낼 수도 없고…. 또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집행을 부탁하지만 따스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 달에 10만원인 임대료를 3년간이나 못낸 채무자에게 아파트관리사무소 측이 강제집행을 신청해서 현장에 갔더니 벽에 걸린 여중생 교복 한 벌이 눈에 들어옵디다. 채권자인 아파트 관리소 직원에게 명도집행을 좀 늦추자고 부탁했죠. ‘아이가 갑자기 자기 방이 없어져 버린다면 그 여린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요?’라며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관리인도 ‘딸 생각이 난다’며 승낙했고 다행히 세입자는 그 며칠 동안에 임대료를 갚았습니다. 채무자가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임대료가 밀린 사연을 듣고 먼저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한 채권자, 채무자의 중학생 아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만은 남겨두라고 부탁하는 채권자 등이 있어 이 살벌한 세상도 살 만한 것 같습니다.”

-집이며 살림살이를 압류당하거나 쫓겨날 때는 채무자들의 감정이 격해질 텐데 봉변을 당한 일은 없었나요.
“있죠. 방에 들어가자마자 먹고 있던 라면을 머리에 뒤집어씌운 사람도 있고, 무단점유해서 살고도 철거를 하라니까 3형제가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 들기도 하고, 시너를 뿌리겠다고 협박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제 경기악화가 본격화되어 벌써 지방에서부터 일거리가 늘어나던데 내 수입이야 많아지겠지만 이 추위에 쫓겨나 거리에 나앉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수입이 많을수록 슬퍼지는 게 우리 직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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