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아직 못이룬 버마 민주화 내 아이들이 원망할까 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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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09.29 0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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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버마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내툰 나잉 총무
아일랜드의 록그룹 U2의 노래 ‘워크 온(Walk On)’이 흘러나왔다.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내툰 나잉(Nay Tun Naing) 총무에게 건 전화의 통화연결음이다. ‘워크 온’은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를 위해 만든 노래다. 보컬을 맡고 있는 보노(Bono)는 보장된 삶과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더 큰 뜻을 위해 고국으로 돌아간 수치 여사의 선택을 “20세기 가장 용기있는 행동 가운데 하나였고, 그 행동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내툰 나잉 총무도 자신의 인생 자체로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린다는 점에선 수치 여사와 비슷하다. 19세 때인 1988년 버마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한 그는 한국으로 넘어와 정치 난민이 됐다. 20여년 동안 고국과 타국에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지칠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없었다. “20년 동안 했는데도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민주화에 20년만큼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상황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지난해 9월 대규모 유혈사태를 빚으며 시민들의 항의 시위를 진압했던 군부는 지난 5월엔 태풍이 버마를 덮쳐 150만명의 국민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국제 사회의 경고를 무시하고 국민투표를 강행, 신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래도 내툰 나잉 총무는 “내 자녀가 나에게 ‘아버지 세대가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민주화가 못 된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끔찍하다”며 “얼마나 더 해야 할지 모르지만 끝까지 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향해선 “민주화를 이룬 한국을 보면서 희망을 갖지만 또 한편으로는 버마에 무기공장을 세우는 한국 기업이 있는 것을 보면 절망스럽다”며 “군부독재의 아픔을 겪은 한국이 버마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을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부천 NLD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지난 17일 그를 만났다.
-한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정치 난민이 된 지 5년째입니다. 왜 한국을 택했습니까.

“버마에서 항쟁 기간 동안 학생운동을 했는데 비밀경찰이 따라붙는 등 제약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시위 참여에 반대하셨지만 해외로 나가는 것이 저의 신상에 더 안전하다며 해외로 나갈 것을 권유하셨죠. 실제 나와 같은 이유로 호주, 태국, 미국 등 해외에 있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한국을 택한 이유는 우리나라와 역사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군사정권 때문에 많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김대중’이라는 야당 지도자가 있었고, 5·18 광주 민주항쟁을 겪은 역사들을 외국 잡지를 통해서 버마에 있을 때부터 접했습니다. 그런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배우고 싶어서 오게 됐습니다. 당시 한국엔 버마 민주세력이 없어서 처음 이곳에 와서 버마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비자 없는 불법체류 외국인이 되면 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난민 신청을 했고, 지금까지 7명의 동료가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2007년부터 1년 동안은 성공회대 아시아 국제 NGO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어요.”

-한국에서의 버마 민주화 활동에 만족합니까.
“한국에서 9~10년 정도 활동하면서 버마의 상황에 대해서 잘 몰랐던 한국 사회에 버마 민주화에 대해서 많이 알린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버마 난민 교육을 위한 모금도 하는 등 도와주고 있고 매주 화요일 정기적으로 ‘프리 버마’라는 캠페인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버마의 소망을 짓밟는 한국의 기업 얘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버마에 천연자원이 있어서 많은 국가와 기업들이 개발하고 싶어하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버마의 상황은 조금 특별합니다. 국민들의 생활은 빈곤하지만 투자와 개발로 인한 이익은 군부로 돌아가고, 국민소득의 절반 가까이가 군사비로 쓰입니다. 버마 국민들을 주적으로 간주한 군부가 민주화 항쟁을 무력으로 막기 위한 준비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한국 기업이 방위산업물품 제조 플랜트를 버마에 짓는다니요. 너무 실망했고, 화가 났습니다. 한국은 군부독재라는 아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어서 버마의 상황이 어떠한지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버마로 돌아가더라도 이 일은 마음에 남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버마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버마로 돌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꾸준히 활동을 해서 민주화된 버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지요. 둘째는 해외에 나와서 민족민주동맹 해외 지부에서 활동하는 우리 같은 동지들이 버마 안으로 들어가서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버마 내부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최소한의 정치적 의사 표현만으로도 불법으로 체포되고 감금을 당하죠. 정치범 숫자가 2000명 가까이 된다고 하지만 아직도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릅니다. 해외 활동이라는 것이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아직 버마 내부 시민세력의 힘이 미약한 만큼 우리가 경험을 쌓아서 내부로 들어가 활동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포기할 수 없지요. 사람들은 20년 동안이나 활동했는데 달라진 것이 없지 않느냐고 물어보기도 하는데요,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가 민주화에 20년만큼 더 가까워진 것이지요.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모르지만 끝까지 노력할 겁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인데 포기하면 안 되지 않겠어요.”

-한 인간으로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항상 큰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삶이 힘들지 않은가요.
“저의 아버지도 60년대에 군사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세대는 포기했죠. 19살때 학생운동을 하던 당시에 아버지에게 ‘아버지 세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투쟁하는 것’이라고 대든 적이 있어요. 제 자녀들의 세대로부터 ‘아버지 시대에 이뤄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민주화 투쟁을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는 게 제일 무섭습니다. 제 자신보다 5000만명의 버마 국민을 생각해야죠. 물론 힘들죠. 한국에서 공부해서 학위를 받게 됐는데 군부가 불법으로 규정한 NLD 한국 지부 총무이기 때문에 부모님이 졸업식에도 올 수 없었고, 가족을 못본 지 10년이 훌쩍 넘었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힘들다고 하면 안 되죠. 감옥에 투옥된 정치범들도 있고, 일상적인 인권 유린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힘들 것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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