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독립투쟁이 전설로 묻혀서 되겠나, 그래서 나섰다” 윤봉길 의사 친손녀 윤주경 언론 첫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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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09.05 08: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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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탄신 100주년. 스물네살 청년이던 윤봉길은 1932년 4월, 일왕의 생일날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에 모인 일본 수뇌부들에게 폭탄을 던져 당시 중국 지도자 장제스로부터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했다’는 찬사를 받았고,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는 우리의 아픔을 세계에 알렸다. 100주년을 맞아 중국에서도 학술대회가 열렸고 12월엔 일본에서 일어판 평전도 출간될 예정이다.

하지만 친손녀인 윤주경씨(50·광고회사 대지 이사)는 그 어느 해보다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뉴라이트전국연합에서 윤봉길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가 하면 매헌기념관이 있는 양재동 시민공원의 명칭을 매헌공원으로 바꾸려는 계획도 고승덕 의원 등이 반대하고 나섰고, 지난 6월 고향 예산에서 열린 100주년 기념행사가 노래자랑과 음악회 일색이어서 그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프로그램을 찾기 힘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 올해부터 뜬금없이 광복절이 건국절 행사로 변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우상화 등 달라진 세태도 당혹스럽다. “어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절대 조국에 서운함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할머니의 말씀 때문에 윤주경씨 가족은 “윤봉길 의사는 직계자손이 없다”고 소문이 났을 만큼 조용히 숨죽여 살아왔다. 할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독립투사란 자부심으로 살았고, 대학교육도 받아 다른 유가족들에 비해서는 나라에서 혜택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뭔가 이야기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에 대한 인식이 너무 희미해져가고, 다른 유가족들의 생활이 열악하다못해 비참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잊혀지고 전설이 되는 것이 안타깝다

-지난 6월9일 매헌공원 추진위원회 발대식이 열렸는데 8월1일 고승덕 의원이 윤 의사가 서초구와 아무 연고가 없다며 매헌공원으로 바꾸지 말라고 서울시에 공식 요청을 했더군요.
“김덕룡 전 의원(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10년 전부터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의 정신을 계승하자’며 매헌타운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래서 20년 전에 세워진 매헌기념관을 중심으로 길 이름도 매헌로로 부르고 올해 매헌초등학교도 개교됐어요. 연고를 따지는데 그렇다면 충무로와 이순신 장군, 을지로와 을지문덕 장군, 도산로와 안창호 선생 사이에도 아무 연고가 없죠. 양재 시민의 숲으로 익숙해져 있다고 해도 매헌공원으로 바뀌면 어린이들도 ‘매헌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 자연스럽게 윤봉길 의사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지 않을까요. 서초구민 10명에게 물어 7명이 반대했다며 ‘주민들이 강력히 반대한다’고 한 의견서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SBS TV가 지난 6월에 방영한 ‘일본군의 처절한 복수, 윤봉길은 이렇게 총살됐다’에서도 문제가 제기됐고, 폭탄 투척후 일본군에 체포된 사진의 진위가 문제되면서 그 사진이 올해부터 교과서에서도 빠졌더군요.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맞다, 틀리다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친지분들이 맞다고 하시고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아끼시던 김구 선생님이 쓴 ‘도예실기’란 책에 그 사진이 실려있다는 것이 진짜 모습임을 확인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교과서를 만든 회사에서도 시비에 시달렸으니 뺐겠죠. 우리 가족으로선 일본군에 붙들려가는 모습보다는 다른 당당하고 멋진 사진이 실리길 바랍니다.”

-최근에 윤봉길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우파들, 그리고 8·15 광복이 미국의 산물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할아버지가 남긴 어록 중에 ‘우리 청년시대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란 말씀이 있어요. 그 암담한 시절에 부모, 아들, 임신한 아내를 두고 타국에 가서 몸을 던진 분의 충정과 행동을 테러로 매도하다니…. 광복은 미국의 힘이라기보다 우리 땅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조국을 위해 몸바친 분들이 뿌린 피와 눈물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란 건 언제 알았고 그런 집안의 딸이란 의식은 있었나요.
“철이 들고서야 제대로 안 것 같아요. 할머니(윤봉길 의사의 부인 배용순 여사)는 강인한 애국열사의 부인이라기보다 너무 지혜롭고 완벽한 여성이었어요. 16세때 한 살 연하인 할아버지와 결혼, 6~7년 정도만 결혼생활을 했고 할아버지가 농촌운동을 하며 야학도 하느라 늘 새벽에 나가 밤에 돌아오셨는데도 정말 금실이 좋고 애틋한 사이였나봐요. 할아버지는 당신 누이들과 부인인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셨는데 누이들이 틀리면 막 야단을 쳐도 할머니껜 절대 야단을 치지 않았고, 할머니가 밭일을 하느라 바쁘면 한 팔에 아기를 안고 학생들을 지도할 만큼 애처가였다고 자랑하셨답니다. 어머니께도 너무 다정한 시어머니셨고 손주들을 끔찍하게 챙겨주셨지요. 다른 분들이 더 그런 의식을 심어준 것 같아요. 중학교 때 교실이 너무 추워 다들 얇은 실내화 대신에 구두를 신었는데 선생님이 유독 저만 나무라시면서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넌 그러면 안된다’고 하셨을 때 제 사소한 행동 하나가 가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막연히 알았습니다. 항상 윤봉길 의사의 손녀란 시선이 불편했고 사춘기때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연애도 자유롭게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름다운 구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윤봉길 의사는 직계자손이 없다고 소문났을까요.
“할아버지 기념사업회 등의 일을 친아들인 아버지(윤종)보다 할아버지의 셋째동생과 그 아들인 제 오촌당숙이 주관해서일 겁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의거 후, 일제시대엔 도처에서 나쁜 집안 아이로 구박을 받았는데 해방후 갑자기 훌륭한 집안 아들이 되어 친한 척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또 6·25가 터지고 친일파들이 친미파로 변신해 태도가 돌변하는 모습을 보며 ‘세상과 주변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컸어요. 박정희 대통령때도 정보과 형사들이 가끔 집으로 찾아오기도 해서 까딱 잘못하면 아버지와 친한 이들이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셨죠. 50세가 되어서야 좀 안정되셨는데 57세인 198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애국열사인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원망이 크셨을지도 몰라요. 친손자인 제 동생도 이제 37세이고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니 기념사업회 등의 일에 몰두하기가 어렵죠. ‘아들이 제 구실을 못한다’ 등으로 소문났을 때는 억울하기도 했는데 그나마 ‘진짜’ 친척들이니 다행이에요. 어떤 유공자 집안은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이 자손이라고 나서서 포상금도 받고 사업회 기금도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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