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임재천·김경범 외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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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08.29 09: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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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조경란이 열일곱 살 때 만난 첫사랑은 ‘광화문’이다. 사랑이란 우리를 더 넓은 곳으로 불러내는 것이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에게 광화문은 세종로 사거리 주변만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중심으로 탈것을 이용하지 않고 동서남북 걸어 다닐 수 있는 모든 곳을 의미한다. 광화문은 그의 첫번째 도시이자 그가 경험한 첫번째 근대의 장소다. 서울토박이인 그는 사는 곳을 절반으로 나눈다면 봉천동과 광화문으로 이분할 정도다.

소설가 김연수에게 서울 삼청동은 ‘우주의 중심’이다. 우주심(宇宙心)을 제멋대로 작동시키는 세계의 중심이다. 삼청동은 그의 고향도 아니고, 지금 살고 있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7년쯤 살았던 삼청동은 그에게 ‘우주의 마음’으로 남아 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처음 와 보고 맺은 기묘한 인연이자 각별한 추억의 무대다. 조금 특이한 책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문학동네)은 이처럼 도시의 맨얼굴을 아릿하고, 정겨우며, 풋풋하게, 때로는 질박하게 소묘한다. 흔하디 흔한 풍경이지만 사람 냄새와 정감어린 사진에다 문인과 글발 좋은 명사 스무 명이 쓴 도시 이야기가 단아한 듯 풍성하게 펼쳐진다. 스무 명의 별도 필자가 있지만 실제론 다큐멘터리 사진가 임재천과 아트디렉터·디자이너 김경범이 함께 엮은 책이다.

책은 이런 물음을 던지며 첫 장을 연다. “누군가에게, 도시는, 그리운 곳. 탈출하고 싶은 곳.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곳. 떠났으나 떠나지 못한 곳. 눈물겹게 아름다운 곳. 당신의 마음속 도시는 어디입니까?”
도시의 속살을 사생한 것이지만 고향 이야기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도시를 회억하고 숨겨두었던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태어나지도 않았음은 물론 현재 살고 있지도 않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사람, 비록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전생의 인연처럼 그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곳은 고향이나 매 한가지다.

맛깔스러운 글의 형태나 전개, 접근방식은 일정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십인이십색이다. 유년 시절의 기억과 결곡한 삶의 궤적이 담겨 있는가 하면, 도시와 자신에게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역사가 숨쉬고, 태어나고 자란 고향보다 운명처럼 맺어진 제2의 고향이 더욱 질감 있게 등장하기도 한다. 한국문단의 거목 고은과 한승원의 고향 도시는 영욕이 혼융된 역사의 나이테가 분장한 채 출연한다. 시인 고은의 고향 군산은 어린 시절 꿈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외국’이고 ‘타자’(他者)였다. 일제시대를 관통한 그였기 때문이다. 산등성이와 논밭을 삼켜버린 중공업단지가 들어선 지금의 군산도 고은에겐 영혼이 깃들 수 없는, 고향 상실의 공간인 것은 마찬가지다. 담담한 허무랄까.

소설가 한승원의 고향 나주는 ‘배의 대명사’가 상징하듯 강물에 어린 배꽃 그림자로 출렁거린다. 그래서 물 흐르듯 꽃 피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시다.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라는 이름의 한 축을 이룬 나주이기에 고려 태조 왕건의 전설에서부터 삼별초군, 동학군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한복판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승원의 장편소설 ‘다산’과 대하소설 ‘동학제’의 무대가 여기인 것도 아련한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닐까.

소설가 강석경이 늦깎이로 정착한 경주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수도승처럼 비우고 또 비워야 할 도시다. 도시의 매력 가운데 하나인 익명성을 포기해야 하는 경주이지만 진정으로 끄는 것은 도심 한가운데서도 숨쉴 수 있는 자연이다. 어디든 있는 자연이지만 비교할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어서다. 강석경에게 경주는 고향이 아니기에 더욱 진한 사랑의 대상이다.

소설가 오정희가 30년 넘게 살고 있는 춘천은 오로지 남편의 직장을 따라나섰던 게 숙명적인 고향이 된 셈이다. 언제부턴가 자신이 쓴 글에 ‘봄내’라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뜻을 머금은 춘천을 에워싼 물과 안개가 암암리에 잠입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 고백에서 오롯이 느껴진다. 이 도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토로에서는 애정이 한층 진해진다.

시인 김중식에게 고향 인천의 제일감(第一感)은 황해 경제권 수운의 배꼽이며, 대한민국의 가능성이 집약된 곳이다. 뭍의 문화와 물의 문화의 접점이기도 하고, 강화도 북단에서 마주하는 이데올로기 대치의 현장이다. 동해 일출을 보며 웃는 사람보다 서해 낙조 앞에서 우는 사람을 좋아하는 그의 편벽은 인천 갯벌의 연상작용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소설가 이혜령의 보령, 시인 건축가 함성호의 속초, 소설가 심상대의 강릉·동해·태백·삼척, 실상사 주지 재연 스님의 남원, 시골의사 박경철의 안동, 시인 이하석의 대구, 시인 강정의 부산, 시인 허수경의 진주, 시인이자 동다헌 시자 정동주의 통영,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서영채의 목포, 시인 곽재구의 순천, 소설가 한창훈의 여수, 언론인 서명숙의 서귀포. 매오로시 고향의 기억이 머무는 풍경을 특유의 필치로 담아낸다.

언뜻 히말라야 동굴 속에 사는 인도의 구루 스리 오도빈도의 말이 떠오르는 책이다. “이상적인 도시는 무엇보다 우리 인간 개개인의 가슴속에서 실현돼야 한다. 서로의 가슴을 향해 난 길, 그 길밖에는 이상적인 도시로 가는 길이 없다.”

한편의 글맛을 만끽한 뒤 이어지는 사진으로 담백한 후식을 즐기듯 뇌리에 포박해 두면 마치 ‘텅빈 충만감’ 같은 걸 느끼지 않을까 싶다. 속독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시간마저 느릿느릿 흐르는 서정적 도회를 음미하며 이드거니 읽고 또 보면 제격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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