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강용주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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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08.25 0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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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광부들은 갱에 들어가기 전 카나리아를 먼저 안으로 날려보았다. 먼저 날아들어간 카나리아의 소리가 들리면 갱이 안전하다는 뜻이고, 카나리아가 울지 않으면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라 여기고 광부들은 그 갱도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자신의 생사를 걸고 광부들에게 위험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강용주씨(48)는 스스로를 “뒤집어진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했다. 1985년 구미(歐美)유학생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고문에 못이겨 거짓 자백을 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운동권 학생,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면서도 준법서약을 거부한 비전향수,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출소한 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는 보안관찰 처분자. 이런 ‘신분’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될 때 만인의 자유가 똑같이 보장될 것이라는 얘기다. “카나리아가 죽은 탄광에서 광부가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최연소 장기수로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면서 전향하지 않은 이유를 그는 “전향은 정치적인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다”라며 “사상이나 신념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준법서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가 2003년 폐지된 전향제도를 ‘분단상황에서 최소한의 요구’ 운운하며 정당화하려 했던 주장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답이다.

감옥에서 나와 ‘늙다리 전문의’가 되어 자신의 꿈을 이뤘지만 그는 여전히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악법”과 싸우고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기 때문에 보안관찰 처분자로서 관할 경찰서에 자신의 움직임을 신고하고 3개월마다 주요 활동 사항을 관할 경찰서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법을 이행하지 않아 불구속기소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는 “악법에 복종하는 것은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기꺼이 불복종을 택했다.

-14년 만에 학교에 복학해 입학 22년 만에 전남대 의대를 졸업하고 레지던트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요즘은 쉬고 있어요. 하루 일과를 말하자면 일어나서 와플 구워 먹고 아내 출근시키고 책보고 일 있으면 나가고 그런 일상입니다. 제가 1999년 2월에 출소하고 그 해 8월에 복학했어요. 그 뒤로 5년 동안 의대 공부하고 졸업하고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을 한 뒤 올해 2월말에 전문의를 땄어요. 출소해서 한 번도 안놀았더라고요. 저도 안식년을 갖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쉬는 것은 아니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활동은 아니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하는 고문피해자 치유모임을 하고 있어요. 민가협 회원과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등과 함께 1주일에 한 번씩 합니다. 몇십년이 지났는데도 5, 6공 또는 박정희 때 조작 사건이나 정치적인 사건들로 인해 고문을 당했던 분들이 고문의 후유증에 아직도 고통당하고 있거든요.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 등이 그분들을 치유하고 재활하도록 돕는 게 잘 되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4년간의 수감 생활에 대해 물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까.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입니다. 말 그대로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이 간첩단의 배후가 됐다는 그런 사건이죠.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야생초 편지’로 유명한 황대권씨 등입니다. 이분들이 유학가서 우리나라 민주화 문제, 통일 문제 등을 연구했나봐요. 저는 당시 전남대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고 학내 조직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과 저를 엮어버린 겁니다. 유학을 갔던 사람들의 지도를 받아 간첩활동을 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때는 2·12 총선 이후에 야권이 신장하면서 전두환 정권이 위기에 몰리게 되고, 학원안정법을 만들려고 하는 중이었거든요. ‘이렇게 학생운동이 극렬 과격화된 것은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시나리오에 따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만들고 저를 집어넣은 것이었죠.”

-고문과 강압에 의해 당시의 진술이 조작됐다고 밝히셨습니다. 끔찍한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직접 경험하셨는데요.
“저는 다른 사건 연루자들보다 한 달 늦게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먼저 들어간 분들보다는 고문을 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빼고 다 받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잠 안 재우고, 옷벗기고, 때리고, 성적 수치심도 주고요. 85년 9월9일 1시간짜리 TV 방송을 통한 수사결과 발표에서 제가 범행을 인정하는 진술을 합니다. 수사관들이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때렸습니다. 수사관들은 제가 발표할 내용을 불러주고 저는 외우죠. 그리고 지하실로 데리고 가서 테스트를 합니다. 옷을 제대로 입히고 또 한 번 얘기해 보라고 하더군요. 안한다고 하면 때리고, 반복적으로 훈련시키고, 그 뒤에 테스트까지 한 뒤 그 사람들이 오케이할 때까지 외운 답을 읊어야 하는 것입니다. PD 한 분이 저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서 ‘이 사건이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강용주씨의 표정이 당시 화면에 너무도 밝게 나왔다’고 합디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톡홀름증후군이라고 아시죠? 납치를 당했을 때 납치범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동화되는 현상 말입니다. 그래야 한 대라도 덜 맞고, 욕이라도 덜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고문을 받다 보니까 그 사람들이 안 시켜도 저절로 웃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고문은 국가권력에 반항하는 사람을 정신적·육체적으로 파괴하고 다시는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하도록 개인의 인간성과 정체성을 근원에서부터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에 들어가는 문을 언급했는데 저는 인간이 지옥에 들어가는 문을 상상한다면 바로 그건 고문의 고통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고문 등 국가에 의한 폭력에 대한 배상은 받으셨나요.
“참 이상한 것이 고문을 당한 피해자는 있는데 고문 가해자는 없어요. 우리 정부가 95년에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뒤 함주명 선생 등 국가에 의해 고문받았던 사람들과 함께 고문 수사관들을 상대로 소송을 낸 적이 있어요. 우리 사건이 고문에 의해 날조된 것이니까 우리를 고문한 수사관들을 찾아 처벌하고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을 시켜달라는 내용이었죠. 국제사회에서는 고문은 반인도적 범죄라 시효를 두지 않거든요. 그런데 공소시효 소멸로 기각됐고 헌소도 각하됐죠. 함 선생이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씨에 의해 간첩 누명을 썼던 것이라고 재심을 통해 무죄가 밝혀졌고 국가 배상 판결도 났어요. 그게 지난해입니다. 그것도 이근안씨가 잡혀 자백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에요. 만약 95년에 국가가 의무를 다했다면 그분의 억울함은 10여년 전에 해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국가도 고문은 잘못됐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고, 시효를 이유로 가해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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