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아/교육] “언어는 인간의 정체성 규정하는 근본, 지구상 멸종 위기 언어들 보호해야죠”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08.11 08:51:40
  • 조회: 1524
수잔 로메인 英옥스퍼드대학 교수

“요즘 많은 사람들이 영어로 과학 지식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로만 과학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언어인 체로키어, 인도의 공용어 중 하나인 힌디어,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로도 과학을 논할 수 있지요.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라틴어로 과학 지식을 정리하고 전달했습니다.”

대부분의 자연과학 지식이 영어로 전달되고 있는 요즘 “영어가 아니면 과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영어가 과학을 하기에 좋은 언어라는 믿음도 확산돼 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수잔 로메인(Suzanne Romaine·57) 교수가 제공하는 위의 설명은 이런 근거 없는 상식을 바로잡고 있다. 로메인 교수는 지난 20~26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제18차 세계언어학자대회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로메인 교수는 이번 행사에서 ‘국제화 속에서 언어 권리와 언어 다양성’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로메인은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이것을 다루는 언어가 이에 상응해서 발전한다. 하지만 영어가 원래 과학을 다루기에 좋은 언어이기 때문에 과학에 영어가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어가 과학을 하는 언어로 사용되는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어가 지구상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데다, 여러 측면에서 유용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교수는 “어떤 언어로든 과학을 할 수 있다”면서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이 표현되기 위해서는 과학 지식의 생산이 몇 개의 언어, 특히 영어에 국한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교수의 설명을 들으니 유사한 질문이 떠오른다. 선진국과 후진국이 있듯이 언어에도 선진 언어와 원시 언어가 있을까?
“피진(pidgin: 어느 누구의 모국어도 아닌 초기 언어)을 제외하면 원시적 언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몇 개의 유라시아 언어들과 서방의 기술-문화가 세계에 확산된 것은 적자 생존의 사례가 아닙니다. 우월한 문명이 승리한 것도 아닙니다. 유라시아 사회에서 형성된 깊고 복잡하며 구조적인 여건들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합니다.”

로메인 교수가 말하는 ‘언어 다양성’은 위기에 처한, 소수자가 쓰는 언어를 보호하는 것과 연결된다. 로메인 교수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언어들 가운데 10명 미만이 사용하는 언어는 204개, 10~99명이 사용하는 언어는 344개다. 99명 이하의 사용자를 가진 지구상 언어가 모두 548개로, 이것은 세계 전체 언어의 10분의 1에 달한다. 그렇다면,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는 왜 보호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가?
로메인 교수는 “멸종 위기 언어는 문화적 정체성을 후세로 전달하기 위해 보호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호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인권(언어적 인권, LHR: linguistic human rights)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구상 국가들 중 4분의 1만이 한 개 이상의 언어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호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는 위기의 언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적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언어적-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한다는 것은 사회 정의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언어와 문화의 독자성은 인간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세계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지역적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지역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이것을 자녀들에게 전수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이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문화적-언어적 다원성은 국가적-정치적 정체성을 약화시키기보다는 다양성 속에서 새로운 인류를 창출하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안정적인 다언어주의(multilingualism)를 적극적으로 육성함으로써 세계성-국지성, 통일성-다양성 사이의 충돌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언어 서비스 조직이 만드는 ‘에스놀로그 15판 (Ethnologue: Languages of the World, 2005)’은 지구상의 6912개 언어에 관한 통계를 수록하고 있다. 로메인 교수는 “이들 언어 중 60~90%가 100년 이내에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로메인과 네틀이 공동 집필한 ‘사라지는 목소리들(Vanishing Voices, 2002)’에 따르면 지난 500여년 동안 지구상에서 파악된 언어들 중 절반이 소멸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세계는 언어적 균형(linguistic equilibrium) 상태에 있었습니다. 생성되는 언어의 수와 소멸되는 언어의 수가 같았다는 얘기이죠. 그런데 지난 1만여년 동안 다양한 사건들이 이 균형을 영원히 깨뜨렸습니다. 농업의 발명과 확산, 식민주의 확산, 산업 혁명, 세계화, 전자기술 발전 등으로 지구촌 현상이 만들어졌어요. 이런 변화들은 유라시안 계통의 몇 개 안 되는 언어들을 수 세기 만에 지구상에 널리 확산되도록 했습니다. 큰 언어들이 작은 언어들의 희생 위에 확산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언어적 현실을 감안해 유네스코는 2008년을 ‘세계 언어의 해(the year of world languages)’로 정했다. 유네스코는 언어 문제를 중심문제로 삼아 모든 언어들, 특히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협력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로메인 교수는 “언어에 관한 정책 문제를 정치·경제적 사정이 다른 국가들에 적극 조언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털어 놓았다. 이 때문에 유엔스코는 조심스럽게 언어 다양성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 전 국내에서 한바탕 영어 논쟁이 일었다. 유럽 국가들의 사정은 어떨까?
“유럽에서도 영어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고, 이에 따라 외국어 정책이 변하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학교 교육을 통해 더 어린 나이에 영어와 모국어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두 언어 사용자(bilingual)’가 되고 있어요. 학교를 다니는 연령층에서 ‘한 언어 사용자(monolingual)’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지요. 유럽 연합에서는 학생들 중 90%가 영어를 제1의 외국어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볼 때 한국 학생들이 집에서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한국 내 학교에서 영어를 더욱 중시한다고 해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어 하나만을 강의 언어로 사용하도록 강제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로메인 교수에 따르면, 영국에는 현재 웨일스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등 여러 토착 언어를 비롯해 이민자들이 갖고 온 펀자브어, 키프로스 희랍어 등 500여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런던이나 버밍엄 등 도시 지역에는 더 많은 수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카리브해 지역, 아시아 등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있어 런던에만 해도 200여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서는 토속어와 영어를 공동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수잔 로메인 교수는 197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브린 모르 대학(독일어와 일반언어학), 영국 에든버러 대학(음성학)을 거쳐 1981년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버밍엄대 교수, 네덜란드의 막스 플랑크 심리언어학 연구소 선임연구원 등을 역임한 로메인은 1984년부터 지금까지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어학 분야의 머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수는 유네스코의 전문가 그룹에서 세계 언어 보호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소수민족 언어권리 보존을 위한 일에도 관여했다. 로메인 교수는 ‘피진과 크리올 언어(Pidgin and Creole Languages, 1988)’ ‘2개 국어 상용(Bilingualism, 1995)’ ‘사회 안의 언어(Language in Society, 1994. 올 가을 국내 번역본 출간 예정)’ ‘젠더의 소통(Communicating Gender, 1999)’ 등 모두 18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 논문은 156건에 이른다.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