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당구장 다시 찾는 중년남성들 “마음은 스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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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자료제공 : 경향신문[http://www.khan.co.kr]
  • 08.07.02 08: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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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업을 하는 정진모씨(54·서울 서초동)는 최근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요즘 새로 취미를 붙인 당구 때문이다. 지난 연말, 친구들과 우연히 당구장에 갔다가 예전의 추억과 실력(?)을 다시 찾은 후 요즘은 퇴근 후 당구장 출입이 잦아졌다. 부쩍 귀가가 늦어지자 아내는 “왜 밤늦게 다니냐” “바람난 게 아니냐”며 잔소리를 했다.

“친구들과 당구 치느라고 늦었다고해도 안 믿어요. 만취한 것도 아니고 기분이 상쾌해져 들어가니 그런 오해를 받을만하죠. 하지만 친구들과 재미있게 당구를 치고 난 후에 마시는 생맥주의 시원함, 아직은 다리 힘이 있다는 걸 느낄 때의 행복감에 비하면 아내의 잔소리쯤은 충분히 견딜 만 합니다.”

정씨처럼 당구장을 찾는 중년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의 경우 1시간당 비용이 3, 4명이 즐길 수 있는 당구대 하나에 1만원 정도인 데다 체력 소모가 많지 않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으면서도 자연스레 걷기 운동의 효과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당구는 다른 운동보다 머리를 많이 쓰기 때문에 지능 개발과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중년 남성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노래방, 비디오방, PC방 등 ‘방 문화’에 밀리고 골프장과 승마 등 귀족 스포츠에 기죽었던 당구장이 ‘7080세대’의 복고 붐과 더불어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지난 5월16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집계한 ‘전국 등록·신고 체육시설업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1만9527곳의 당구장이 영업 중인 것으로 집계됐다. 당구장은 1999년 2만8307곳을 정점으로 2003년에는 1만4973곳으로까지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이후 증가세로 돌아섰다. 2006년 사행 게임인 ‘바다이야기’가 철퇴를 맞은 후 당구장으로 업종 변경을 한 곳도 늘어났다. 대구시의 경우 한때 1800여개에 달했던 당구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이후 침체 일로를 걸어 250여개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가 최근 650여개로 늘었다. 한 골목에 한 달 만에 3군데의 당구장이 생긴 곳도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중년들의 귀환(?)에 따라 요즘 당구장은 고급화하고 대형화하지 않으면 다른 업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추세다. 서울 강남에서는 주차장을 따로 두는 업소까지 있을 정도고, 강남과 경기도 일산에는 당구대만 50개를 비치한 초대형 당구장까지 생겼다.

직장인들이 추억을 되새기면서 중심가 당구장은 점심과 저녁 시간에 자리 전쟁을 치러야 하고 술집이 몰려있는 유흥가와 주택가 주변도 저녁 시간이면 남성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진 것은 젊은 청년이나 대학생이 아니라 30, 40대 혹은 그 이상의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넥타이를 맨 채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 2008년 당구장의 새로운 풍속도이다.

케이블TV와 당구 얼짱 스타도 인기에 한몫
중년 남성들의 당구 열풍은 △복고풍과 함께 대학 시절의 추억 어린 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 △불경기로 경제가 어려워져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여럿이 즐길 수 있고 건강에도 좋다는 것 △지난해 초 차유람이라는 당구 얼짱 스타가 탄생했고, 아시안게임 본선에 3회 연속 진출하면서 금메달을 10개 획득하는 등 당구 스타의 등장 △케이블과 지상파 TV에서 당구 중계가 늘었고 △예전에 당구를 모르던 사람들까지 가세하기 시작한 것 등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회사원 김동준씨(46·경기 고양시)는 “당구장에 가면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한 풋풋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지금처럼 PC방이나 노래방이 없던 시절에 당구장은 남자 대학생들의 놀이터이자 천국이었죠. 10분에 50~200원. 한 시간 동안 2명 또는 4명이 놀아도 단돈 1000~2000원이면 해결되는 놀이니 주머니가 가벼워도 즐겁게 놀 수 있었죠. 여자 친구를 데려가 괜히 당구 가르쳐 준다면서 스킨십도 해보고…. 몸은 벌써 삐그덕거리지만 당구장에 오면 마음은 아직 청춘이에요.”

70,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중년 남성이라면 대부분 당구의 추억이 있다. 수업도 빠지고 당구장 문 열 때부터 점심, 저녁을 해결하고 밤 늦은 시간 버스가 끊길 무렵에야 퀭한 눈에 지친 몸이지만 머릿속에는 당구알이 마구 굴러다니는 도취감으로 돌아오던 귀갓길이 지금처럼 처량하지는 않았다. “아줌마, 났어요!”라고 소리 치며 승전보를 울리듯 떠드는 소리, 마치 엄청난 작전계획을 짜거나 치밀한 구상을 하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당구대를 살피던 매서운 눈초리, 허기질 때 시켜먹던 자장면의 맛과 가끔 먹던 꼬마김밥의 추억. 이제는 가난한 대학 시절과 달리 여유가 있어 자장면만이 아니라 요리도 시켜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 먹던 불어터진 자장면과 노란 단무지의 맛을 다시 찾기는 힘들다.

IMF와 PC방이라는 파고를 거치며 온갖 풍상을 겪은 당구장에도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요즘은 어지간한 식당, 카페 등에선 금연이지만 당구장은 여전히 흡연자 천국이다. 영화 ‘허슬러’의 주인공처럼 담배를 물고 그 연기에 눈이 매워 찡그리면서도 매서운 눈으로 공을 겨누는 모습이나 당구대 여기저기 담뱃불로 인해 생긴 자국들은 여전하다. 신 벗고 편하게 치라고 놔두는 슬리퍼도 필수품. 서울을 제외하고는 10분당 1000원이라는 당구비도 10년 넘게 크게 오르지 않았다.

중년 남성들에게 큐대를 다시 잡게 한 것은 케이블 방송이 크게 작용했다. SBS 스포츠, ESPN, 엑스포츠 등 케이블 방송사가 스리쿠션 대회나 연예인 당구 대회를 3~4년 전부터 중계하면서 잊혀졌던 아련한 추억을 되살렸다. 케이블 방송에서 당구 경기 장면을 보면서 “다시 당구 한번 쳐볼까”하는 자극을 준 것이다. 또 차유람 같은 미모의 당구선수가 등장하고, 아시안게임에서 잇단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인지도가 높아진 것도 일반인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요인이 됐다 이처럼 당구 인기가 부활하면서 사이버 세상에서도 온라인 당구게임이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넷마블을 비롯해 게임 포털에서는 회원 수와 온라인 접속자 수가 증가 일로에 있다. 최근 등장한 당구 게임은 입체감이 뛰어난 3D 화면에 끌어치기, 밀어치기 등 다양한 실전기술을 구사할 수 있어 당구 마니아들에게 인기다.

골프나 다른 취미 활동에 비해 큰 돈이 들지 않는 것도 당구의 가장 큰 매력이다. 요즘 당구장 요금은 10분당 1500원 안팎이 대부분이다. 사무실 밀집지역에서는 10분당 1700~1800원을, 일부 지역에서는 2000원을 받는다. 대학가 주변을 비롯해 싼 곳은 1000원 정도이다. 국제식 대대는 2000~2500원가량. 3, 4명이 2시간 동안 당구를 쳐도 2만원 정도면 충분하고, 3시간을 쳐도 1인당 1만원 정도면 된다. 대부분 내기를 하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공짜로 즐길 수 있는 데다 져도 별로 지출이 많지 않다. 월급은 빤한데 기름값 등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에 아이들 교육비에 등이 휘청거리는 중년 샐러리맨들에게 당구장의 부활은 반갑기만 하다. 덕분에 요즘 중년층의 동창회나 모임 풍속도도 바뀌었다. 과거엔 회식을 한 후 2차로 노래방에 가거나, 단란주점 등에 들렀지만 이젠 “소화나 시키자”며 자연스럽게 당구장으로 가서 조별 당구대회를 하기도 하고, 이긴 팀이 맥주를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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