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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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8.06.10 0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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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는 비싸다.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이 5000원, 핫도그 하나에 1만5000원이나 했다. 날씨도 변덕스럽다. 멕시코 난류와 북구의 찬공기가 충돌하는 지역이라 맑았다가도 흐리고, 흐리다가도 맑아진다. 그런데도 노르웨이는 늘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꼽힌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는 몇 해 전 완벽한 여행자가 꼭 가봐야 할 곳 50곳을 선정했는데 북유럽으로는 유일하게 노르웨이 해안을 꼽았다.
물가도 ‘악’ 소리나게 높고, 날도 짖궂은데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노르웨이를 동경할까?. 경이로운 피오르드도 유명하지만 해안 마을도 아름답다. 난바다로 나가거나, 만으로 깊숙이 숨어들기 쉬운 바닷가엔 역사도 구구하고, 모양이 아름다운 마을도 있다. 이 마을들은 피오르드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100년전 건축물이 즐비한 ‘올레순 Ålesund’
적당하게 작은 도시를 사랑한다. 도시는 너무 크면 헤벌어져서 짜임새가 없다. 작으면 초라해서 볼거리가 많지 않다. 노르웨이 중부 해안의 올레순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아담하다. 인구 4만2000명. 미술사학을 하는 사람들에겐 제법 알려진 아르누보 도시다.
도시 중심가에는 키를 맞춘 100년 안팎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겉모습은 비슷한데 장식은 어느것 하나 똑같은 게 없다. 건물이 지어진 것은 20세기 초 1904년부터 1907년 사이 재개발로 새로 세운 도시다. 유럽에서도 재개발을 했다고? 거기 안타까운 스토리가 있다.
1904년 1월23일 새벽 2시15분 마가린 공장에서 불이 났다. 불길을 바닷바람을 타고 나무 집들을 하나하나 삼켰다. 이튿날 오후 5시에 불은 꺼졌으나 1000여채의 가옥 중 850채가 불에 탔다. 주민 1만2000명 중 1만여명이 이재민이 됐다. 소방서 옆에 살던 노파 한 사람만 사망했다. 인명 피해가 적은 게 그나마 기적이었다.
올레순이 잿더미가 됐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유럽 곳곳으로 퍼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구호의 손길은 요즘만큼 빨랐다. 독일의 빌헬름 2세가 보낸 구호선은 화재발생 이틀 만에 도착했다. 대체 이 작은 마을을 돕기 위해 어떻게 유럽 각국이 발빠르게 움직였을까?
“1900년대 초 이미 피오르드는 세계적인 여행지였고 올레순은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관문이었죠. 독일 황제는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를 7번이나 방문했기 때문에 올레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이드는 올레순 앞바다는 대구어장으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지금도 노르웨이 최고의 항구이며 세계 최고의 대구수출지다.
유럽에서 보내온 물자 중에는 경첩이나 문고리 같은 건축자재도 있었다. 당시 정부는 국가재정을 쏟아부어 마을을 재건했다. 세계 각국에서 공부한 노르웨이 건축가 50여명을 불러 다양한 모양의 집을 지었다. 이때 지은 집들이 도심 한복판에 있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집이다. 아르누보는 요즘말로 바꾸면 뉴 아트(New Art), 새로운 예술이란 뜻이다. 이때 지은 집들은 겉멋을 많이 부렸다. 한 건물에 같은 모양의 창이 없고, 장식도 아기자기하다. 지혜를 상징하는 부엉이를 새겨넣었는가 하면 병원이었음을 상징하는 꽈배기 모양의 장식도 보인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로맨티시즘의 영향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은 건축물만 보고 아르누보 양식임을 눈치채긴 힘들다. 이런 집이 하나만 있었다면 어쭙잖게 멋을 냈다고 촌스럽다고도 했을지 모르겠다. 수백채가 한자리에 모여있으니 건축학도에겐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일반 관광객은 호텔이나 아파트로 개조한 어선창고가 더 아름다울 것이다. 노란 색과 붉은 색을 칠한 건물들은 어느 만화영화의 세트장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귀엽다. 창고 앞 수로에는 범선과 요트가 정박해있다.
마을 전경은 악슬라산 전망대에 오르면 잘 보인다. 마을은 반도처럼 쭉 뻗어있고,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이 퍼져 있다. 100년 안팎된 건축물들의 뾰족지붕들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으면 마치 형형색색의 로고블록을 마을을 꿰어 맞춘 것처럼 보인다.
중세의 수도이자 예술의 고향 ‘베르겐 Bergen’
베르겐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노르웨이가 아니라 베르겐에서 왔다”고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베르겐은 중세엔 노르웨이의 수도였다. 일단 역사를 먼저 들춰보자.
12세기 이후 유럽은 교통이 발달해 상인들이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 상인이 바로 한자(Hansa)다. 이 상인들을 보호하자는 도시동맹이 바로 한자동맹. 베르겐도 한자동맹의 주요 도시였다. 베르겐의 브리겐 부두에는 독일인만이 묵는 상관을 짓고 무역을 했다. 베르겐의 명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때 당시의 건축물이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여 있는 옛 건축물들은 조금씩 기울었다. 나무 바닥은 삐걱거리지만 브리겐에는 바도 있고, 기념품점도 있으며 예술가의 작업실도 있다. 금요일 밤 오후,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브리겐의 바는 노르웨이인과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왁자하다.
이런 나무집도 사실은 재건축으로 사라질 뻔 했다. 당시 주민들은 좀이 슬지 않게 생선기름을 발랐는데, 걸핏하면 불이 났단다. 그래서 지방정부는 건축물들을 모두 부수고 석조건물로 지으려 했다. 재건축 공사를 시작하려 할 때 엉뚱하게도 다른 지역에서 불이 나면서 이 나무집을 허물자는 계획은 흐지부지됐다.
베르겐 사람들의 자부심 중 하나는 베르겐이 예술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솔베이지의 노래’로 유명한 그리그, ‘절규’를 남긴 뭉크, ‘인형의 집’을 쓴 극작가 입센이 베르겐에서 활동했다. 그리그가 살았던 작업실에선 바다가 빤히 내려다 보였다. 그리그는 죽어서도 노르웨이 바다를 보고 싶어했단다. 그의 유언에 따라 바위 벽에 구멍을 내고 그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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