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당당한 음악세계 20년 ‘영혼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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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8.05.28 09:23:33
  • 조회: 10739
어느덧 20년이다. 그의 이름만을 보고 음반을 사는 마니아 층도 적잖고, 그 까다롭다는 평론가들도 음악성을 인정한다. 탬버린을 들고 깡충깡충 뛰면서 노래를 부르던 선머슴 같은 모습에서, 지금의 그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아이돌스타’로 출발했지만, 대중의 관심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난 그는 자신만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그의 음반 두장은 경향신문이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올랐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는 단순한 ‘가수’라는 말보다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아티스트’라는 말이 어울리는 이상은(38)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해가 지날수록 음악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면서 “20대 때는 한계를 뛰어넘고, 극도의 높이뛰기를 하듯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했는데, 지금은 생활근처에 있는 감성, 삶의 배경음악이 될 수 있는 음악들을 힘을 빼고 잔잔하게 하려 한다”고 했다.
‘연예계 생활이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연예계를 떠난 지 오래됐다. 연예계가 아니라 문화계에 있으려고 한다. 문화계는 전혀 안 힘든데, 좀 가난하더라”고 답했다. 그는 “돈을 많이 버는 길을 가서는 안되고, 음악성은 지켜야 하고, 순교자 같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13집을 만들 때 내가 강해진 걸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신보를 내기까지 3년은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척박해진 환경이 되다보니 음반을 안 내는 게 지혜로운 시대가 됐다”고 다운로드 등으로 어려워진 음반 시장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했다.

-데뷔 20주년입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처음에는 쑥스러웠는데,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좋습니다. 6월7일에는 20주년 콘서트를 하고 8월 중순에는 팬클럽과 같이 강변가요제가 열렸던 남이섬에서 파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20주년이 되니까 안식년이 된 거 같아요. 쉰다는 느낌이 들고.”
-음악세계에 변화가 많았습니다. 데뷔 때는 아이돌스타였지만 이후 경로를 수정했습니다. 긴장감 속에 깨질 듯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평을 들은 6집 ‘공무도하가’는 지금도 회자됩니다. 11집 ‘신비체험’ 이후엔 음악이 편안해졌다는 평을 받습니다.
“20대 때는 ‘20대스러운’ 30대 때는 ‘30대스러운’ 음악이 나온 거 같아요. 공무도하가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한 앨범이었거든요. 가장 먼곳에 가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고, 가장 깊은 이야기를 노래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서른살 때부터 생각이 바뀐 것 같아요. 새로운 것들에 눈이 뜨이는데, 저의 경우에는 일상이었어요.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즐겁게 견뎌나가는 힘을 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멀리 가고 높이 날아간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일관되게 담으려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어떤 인터뷰에서 ‘어떻게 해서든 영혼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했던데.
“아름다움이오. 20대 때 느낀 아름다움과 30대 때 느낀 아름다움은 다른 것이었지만, 아름다운 음악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을 담겠다’는 이야기는 자기 영혼을 느끼면서 작곡을 하고, 그런 노래를 통해 삶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다는 뜻이었죠. 저는 사람이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이 삶에 치여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여행도 다니고 해요. (좋은 음악은 어떤 거라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면서도 저만의 독특한 가사라든가 멜로디가 있는 게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유하는 즐거움과 가치가 있으면서도 독창성도 ‘따로또같이’ 있을 수 있는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요.”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공무도하가’가 10위였습니다. 7집인 ‘외롭고 웃긴 가게’도 99위에 올랐고요.
“그 음반들은 몇장이나 팔릴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나온 거예요. ‘공무도하가’는 무진장 돈을 많이 들이고, 시간을 들여서 만든 여유로운 음반이었어요. ‘외롭고 웃긴 가게’는 한 장도 안 팔려도 좋으니 멋대로 하자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아주 가난하게 만들었죠. 지금은 그런 상황이 잘 안주어지네요. 역시 1990년대가 그리워요. 그때는 다운로드가 없어서, 음반시장도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보다 자유롭고 재미난 기획들도 많았던 거 같고요.”

-다운로드를 언급했는데, 그것 때문에 음반시장이 완전히 죽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신보를 내기까지) 3년은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내는 거 자체가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예산으로 음반을 만드는 것도 지치고, 저는 당분간 오래 기다려볼 생각이거든요. 다운로드 받는 분들이 ‘이상은 음반이 왜 안나와’ ‘다운로드 받아서 안나오는 거야’라고 뼈아프게 느끼는 상황이 오기를 바라요. 우리나라는 대중음악 인프라가 후진 정도가 아니라 말이 안되는 건데, 아무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음반을 내야 한다면 국내 자본으로 힘듭니다. 국내에선 어떤 음반사에서 음반을 내든 죄를 짓는 게 되는 거예요. 갚지도 못할 빚을 지는 거죠. 해결방법은 음반을 안 내거나 여유있는 외국자본의 투자를 받거나 하는 거죠.”

-‘이상은 in Berlin’이라는 여행기를 냈습니다. 미국과 일본에도 오랜 시간 머물렀는데, 보헤미안 기질이 있습니까.
“여행하는 거 무척 좋아해요. 20대 때 7년 정도를 산 일본의 경우는 그리울 때도 많고요. 한국에 있으면서 한 3개월만 지나면 막 나가고 싶어요. 문화적인 갈증을 풀 수 있거든요. 새 음반이나 신보를 외국에 가서 먼저 발견하고, 자료나 정보가 많아요.”

-탬버린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던 담다디 때와 지금 모습이 많이 다릅니다.
“18~19세 때는 누구나 까불잖아요. ‘전국노래자랑’ 출연자들처럼 ‘TV 나왔다. 날 좀 봐주이소’ 같은 거였어요. 그게 어느 순간 일이 되고, 틀이 되면서 고민한 거 같아요. 서커스의 곰이 된 거 같은 느낌이었어요.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방송국에서 담다디를 한 50만번 부르지 않았을까요. 20만번 부를 때부터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집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습니까.) 너무 피곤했어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한달 내내 코피를 흘렸어요. 코피가 멈추지 않아 병원가서 치료 받고 그랬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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