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70년대 단발머리 열풍 주역 ‘미용계 대모’ 그레이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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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8.02.27 08:51:38
  • 조회: 581
77세의 할머니, 지난 4년간 두 차례에 걸친 유방암·위암 수술. 여기에 지난해 3월 위의 70%를 절제하는 바람에 체중이 20㎏ 감량. 현재 통영에서 홀로 지내며 일을 하러 2~3개월에 한번씩 상경.

이런 신상정보만 들으면 “저런저런, 그 나이에…”라며 연민의 눈길을 보낼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신상명세의 주인공인 ‘영원한 현역’ 그레이스 리는 이런 선입견을 완벽하게 배신한다.
그가 누구인가. 1970년대 대한민국에 단발머리 열풍을 일으키며 국민훈장까지 받은 미용계의 대모. 그는 지금 통영에서 ‘중국요리 이선생’이란 중국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단골들을 위해 출장 상경해 아직도 가위를 드는 최고령 현역 헤어디자이너다. 찰랑거리는 생머리 단발에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으로 최근에 읽은 책이나 새로 맛본 음식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면 그의 나이도, 과거사(?)도 잊게 된다. 위암 수술 덕분에 날씬해져서 몸도 마음도 가볍다는 그레이스 리는 올해 두 권의 책을 펴내고 통영에 미용실을 열 계획으로 10대 소녀처럼 들떠 있다.

“올해 행운의 숫자인 7이 두개 겹친 77세라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요. 새로운 일에 대한 아이디어가 막 샘솟아 즐거워요.”
남들은 위염에만 걸려도 사색이 되는데 위암진단을 받고도 “1기래요, 1기. 다른 노인들은 대부분 2, 3기나 말기에 발견되는데 난 아주 싱싱한 1기래”라며 즐거워하던 낙천성으로 그는 위암수술 후 의사들도 놀랄 만큼 빨리 회복되었다. 그리곤 젊은이들보다 더 의욕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마음먹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암에 걸린 게 행복할 리야 없지만 불행해할 이유도 없어요. 난 70년 넘게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억울할 것 없고 수술이건 항암치료건 어떤 전쟁도 담담히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거든. 그게 나이의 힘이죠. 암이나 죽음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서 빨리 극복한 것 같아요. 왜 내가 암에 걸렸을까, 암세포가 퍼지면 어떡하나, 곧 죽으면 어쩌지 등의 걱정과 공포가 제일 나빠요. 암세포에게 ‘난 할 일이 많아 네게 신경써주지 못하니 네가 알아서 나가라’라고 얘기하고 그냥 평소처럼 지냈어요. 암세포도 신경 안 써주니 심심했는지 사라졌고….”

본명이 이경자인 그레이스 리(사진)는 37세까진 살림만 하던 주부였다. 여고졸업 후 곧바로 결혼, 아이 셋을 키우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 미국에서 미용공부를 했다. 돈벌어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30대 중반에 미용실 청소와 머리감겨주는 일부터 시작, 폴 미첼 등 대가에게 사사한 후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내 헤어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미국 패션전문지 보그지에 작품이 실렸고 장안의 멋쟁이들이 그를 찾았다.
그레이스 리 커팅클럽을 통해 후진도 양성하고 서울 대학로, 청담동 등 첨단패션거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던 그는 우연히 통영에 갔다 공기좋고 먹거리가 많다는 이유로 무작정 아파트를 구입, 이사했다. 평소 미식가로 소문난 그가 문을 연 ‘중국요리 이선생’은 싱싱한 통영의 해산물로 만든 음식들로 통영의 명물이 되었다. 건강한 사람도 힘이 빠져 은퇴할 법한 77세, 두 번이나 암수술을 받은 그가 이젠 베스트셀러의 저자에 도전하고 통영에 서울 청담동보다 더 높은 수준의 미용실을 만들겠단다.

“난 평범한 아줌마였거든요. 아무 특별한 재능도, 야심도 없었어요. 그런데 홀로서기를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니까 나도 모르는 재능이 나타나더군요. 또 이혼, 갱년기 우울증, 암수술 등 아픔도 겪었지만 그때마다 쓰러지지 않고 견뎌냈어요. 나 혼자만 당하는 고통이 아니잖아요. 대신 맛있는 음식, 재미있는 책과 영화, 공연 등 일상의 즐거움을 아주아주 기쁘게 받아들였어요. 지금도 또 암에 대한 걱정보다는 시력이 나빠져 책을 못읽으면 어떻게 하나가 더 걱정이에요. 그래서 삶의 용기를 잃은 여성, 우울증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들에게 ‘나같은 여자도 할 수 있으면 당신들도 멋지게 살 수 있다’란 용기를 주고 싶어 나의 지난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또다른 책은 ‘반찬 일기’라고 해야 할까요. 남들이 내가 요리솜씨도 있고 미식가라고 하는데 내가 매일 먹는 반찬의 비법을 알려주고 싶어요. 멸치를 아삭아삭하게 볶는 법, 오므라이스를 맛있게 만드는 법 같은 거죠. 흔히 오므라이스나 볶음밥을 남은 찬밥으로 만들지만 밥물을 5분의 4 정도만 넣어 고슬고슬하게 지은 따끈한 밥으로 만들 때 제일 맛있거든요. 매일 일기를 쓰듯 365일의 반찬 만드는 법을 알려주면 특히 취업주부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밤에 자다가 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는 어찌나 뿌듯하든지…. 며느리에게 내가 구술하는대로 받아 적어달라고 하청계약도 맺었어요.”

첫번째 책은 곧 김영사에서 출간될 계획이다. 책을 쓰는 한편, 통영에 작지만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미용실을 열어 제2의 고향인 통영사람들을 멋지게 변신시키는 것도 그레이스 리의 올해 목표이다. 솜씨가 뛰어난 후배들이 통영으로 오겠다고 약속해서 요즘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 이달 들어 미술공부도 시작했다. 막내딸이 지난해 생일선물로 사준 미술도구로 60년 만에 붓을 잡고 생선, 꽃 등 보이는 대로 그려봤는데 ‘비슷한 모양으로 그려지는 것’만으로도 가슴뛰고 감격스럽단다. 곧 동네 미술학원에 등록해 초등학생들과 어울려 기초부터 배워볼 계획이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아요. 최신 베스트셀러나 영화를 보니 젊은이들과도 대화가 잘 통하죠. 숫자상의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그런데 내가 좀 늙긴 늙었나봐. 작년까지만 해도 멋진 남자 만나서 결혼할 꿈이 있었는데 이젠 남자보다 일이 더 좋으니 말이에요….”
암세포가 가장 무서워하는건 항암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란 걸 그레이스 리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팔순에 그의 청첩장을 받는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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