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희망의 주먹 날리는 동양챔피언 김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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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8.02.19 08: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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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의 3면은 거울이다. 그 가운데 서서 복서는 자신과 싸운다. 내지르는 주먹이 휙휙 바람소리를 낼 때, 그 주먹은 자신을 향한다. 복서는 말한다. “복싱은 상대의 주먹과 나의 주먹을 겨루는 게 아니다”라고. “복싱은 누가 더 오래 견디느냐를 겨루는 스포츠”라고 했다. 그러면서 거울을 향해 한 번 더 주먹을 뻗었다. 나를 향한 주먹은 인내를 시험한다. 그렇게 거울과 겨루는 게 섀도 복싱. 나의 그림자와 싸운다.

최요삼은 그렇게 견디고, 견디고, 견디다가 결국 하늘나라로 떠났다. 한 달이 훌쩍 지났고 어느새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었다. 복서가 답했다. “복싱이 끝났다고? 열정이 있는 한 복싱은 끝나지 않는다.” 복싱, 희망은 있다. 오히려 최요삼은 잊혀진 복싱을 우리의 안으로부터 끄집어냈다.
복서는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이다. 김정범(29·유명우 범진체육관). 국내 프로복서 중 세계타이틀에 가장 가까이 있다. 올해 초 열린 권투인의 밤 행사 때 남자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김정범은 시상식장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당당하게 외쳤다. “열심히 해서 꼭 세계챔피언이 되겠다.” 거기에 꼭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복싱은 절대 헝그리 종목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다. 그걸 반드시 보여주겠다.”

복싱을 둘러싼 편견
김정범은 지난해 12월9일, 10년을 사귄 손성혜씨(31)와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쉽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왜 고단한 권투선수와 결혼하느냐고 했다. 김정범은 “복서에 대한 편견이 많다”고 했다. 대표적인 것이 세 가지. △복서는 가난하다 △복서는 위험하다 △복서는 체중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한다. 김정범은 일일이 반박했다. “옛날 얘기일 뿐”이라고 했다.
복싱은 헝그리 스포츠였다. 아니, 지금도 어느 정도는 진행형이다. 프로복서는 초급이라고 할 수 있는 4라운드 선수부터 차츰 단계를 밟아 12라운드 선수가 된다. 4라운드 선수의 파이트 머니는 여전히 한심하다. 라운드당 10만원 수준. 4라운드를 뛰면 40만원인데, 이를 매니저와 나눠야 한다. 손에 쥐는 것은 20만원 내외. 경기가 많은 것도 아니다. 김정범은 “1년에 1경기밖에 못 뛴다면 연봉이 20만원인 셈”이라고 했다. 동양챔피언인 김정범은 좀 낫다. 일본에서 타이틀 매치를 치르면 약 1만달러가 손에 들어온다. 여기에 음식 프랜차이즈 회사인 ‘뉴 신토오리’로부터 조금씩 지원을 받는다.

“문제는 제대로 된 프로모터가 없다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프로모터는 단순히 경기를 성사시키는 데 끝나지 않는다. 흥행 카드를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김정범은 “한국 복싱에, 아니 한국 스포츠 전체에 제대로 된 프로모터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지금까지 한국 스포츠의 프로모터는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국가’”라고 했다. 가슴 아픈 지적이었다. 대한민국 스포츠는 정치권력에 좌우됐다. 프로야구도 프로축구도, 정치 바람에 휩쓸렸다. 복싱이 전성기였던 80년대, 1주일에 2~3번씩 밤마다 특집 복싱 방송이 편성됐다. 당시 통수권자가 복싱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스포츠는 국가가 나서야 사람이 모였고 장사가 됐다. 사실, 월드컵 축구도 그랬다.
그래서 더욱 제대로 된 프로모터가 필요하다. 김정범은 “돈 킹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시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시스템은 각 체육관 관장들이 매니저와 프로모터를 겸하고 있다. 전문가가 없는 셈. 게다가 국제시합을 주선하는 데 필수인 외국어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김정범의 세계타이틀 도전 추진에도 난항이 많다. 김정범은 “그래도 영어 잘 하시는 홍수환 선배가 도와주니 곧 되지 않겠나”라며 웃었다.

복싱은 위험하지 않다
최요삼이 떠난 뒤 복싱 관계자들도, 팬들도 걱정이 많았다. 복싱은 위험한 종목이라는 인식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복싱은 위험하지 않다는 게 김정범의 주장이다. 김정범은 “요삼이형이 그렇게 떠났지만, 그건 사고일 뿐이다. 사고가 나면 다 죽거나 다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오히려 마라톤이 더 위험한 것 아닌가. 복싱은 지금까지 2명 죽었지만 마라톤은 훨씬 더 많이 죽지 않나”라고 했다. 사실 마라톤 사고는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러나 마라톤을 위험하다고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김정범은 “제대로만 하면 복싱은 위험하지 않다.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주먹구구식 경기 운영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다”고 했다.
김정범이 ‘커트맨’을 아는지 물었다. ‘커트맨’은 복싱 경기 도중 찢어진 부상을 관리하는 전문가다. 다쳤을 경우 자신만의 노하우로 연고를 조제하고 재빨리 상처를 봉합한다. 외국 복싱 경기에서는 링닥터보다 중요한 인물이 커트맨이다. 김정범은 “그런데 우리는 전문 커트맨이 없다. 커트맨 없이 복싱의 발전은 없다”고 했다.

‘주먹구구식 운영’은 선수 생명 단축에도 큰 책임이 있다. 그래서 복싱은 혹독한 체중감량 때문에 괴로운 종목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범은 “이것도 엉망진창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정범의 평균 체중은 80㎏ 내외. 한계체중 63.5㎏과는 차이가 많다. 하지만 20~30일 걸리는 스케줄에 따라 체중을 줄이면 문제는 없다. 김정범은 “해외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노하우를 배웠다”고 했다.

복싱, 희망은 있다
“요삼이형이 우리에게 주고 간 것은 복싱인의 단합과 우리 주변에도 복싱이 있었다고 팬들에게 알려준 것”이라고 했다. 그가 남기고 떠난 새 생명보다 어쩌면 더 의미있는 것이었다. 사실 복싱계는 갈기갈기 갈라져 있었다. 한국권투위원회(KBC)도 유명무실한 상태로 이어져 왔다. 누군가는 “복싱이라는 종목이 상대와 싸우는 것이다 보니 그동안 단합이 잘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최요삼이 떠나던 날, 전국의 복싱인이 모였다. 그가 목숨을 바쳐 따고 싶었던 챔피언 타이틀, 그러면서 알리고 싶었던 복싱의 의미. 거기에 복싱인이 움직였다.
김정범은 “팬들도 복싱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실제로 김정범이 소속된 서울시 관악구 류명우범진체육관에도 30대 회원들이 늘었다. 이진호 사범은 “최요삼이 떠난 이후 30대 일반인들이 체육관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한 회원은 “복싱을 시작한 뒤 얻은 것은 건강과 자신감”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남은 일은, 세계챔피언이 되어 팬들의 관심을 이어가는 일이다. 김정범은 “복싱은 두 걸음만 물러서면 도망갈 데가 없는 스포츠다. 내 뒤에 바로 링이 있다. 나도 물러설 데가 없다. 어느새 내 어깨에 한국 프로복싱이 걸려 있더라. 그곳이 멀지 않았다”고 했다.
말을 마친 김정범은 로프를 어깨로 밀어올린 뒤 링에 올랐다. 그 어깨와 두 주먹은 어느 때보다 단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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