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34년을 걸어올라 무대 위에 서다[무대서 만난 사람 배우 전종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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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8.02.04 09: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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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왔어 사랑해. 오늘 애썼지.”
30여년 만에 속마음을 담은 남편의 말 치고는 너무 싱거운 것일까. ‘사랑해’ 한마디에 인색했던 지난 세월이 사무칠 뿐이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공연될 뮤지컬 ‘러브’에서 주요 배역인 피터 노인을 맡아 연습에 한창인 전종채씨(60). 그는 아침부터 시작된 뮤지컬 연습이 끝나기 무섭게 영동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간다. 병실에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남편이 뮤지컬 배우가 됐다”며 동네방네 창피한 줄 모르고 자랑하고 다니던 아내였다. 하루종일 남편을 기다리며 병마와 싸웠을 아내에게 전하는 한마디가 안타깝기만 하다.
전씨는 지난 12월 일반인 배우 모집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했다. ‘러브’는 아이슬란드에서 인기를 끈 뮤지컬로 오는 5월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도 공연된다. 노인요양원을 배경으로 주연을 비롯한 등장인물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뮤지컬 제작사는 조연, 앙상블 역에 일반인 노인배우들을 오디션으로 뽑았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전씨는 배우가 일생의 꿈이었다. 졸업 후 2년 동안 단역을 맡으며 연기 밑천을 다지던 무렵, 홀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드러눕자 안정적으로 봉급을 받는 회사원이 됐다. 5년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그때는 이미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으로 자신의 꿈 따위는 내세울 수 없었다.
“34년간 한이 맺혔지요. 정말 배우가 되고 싶었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희망은 더 사라져갔습니다. 한데 노인배우를 모집하는 뮤지컬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하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는 오디션 응시를 앞두고 수원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나홀로 걷기를 감행했다. 21일 동안 꼬박 걸었다. 겨울비까지 맞아가며 걷고 또 걷는 동안 발바닥은 갈라지고 물집이 터지며 고통이 심했다. 하지만 목표 지점이 다가올수록 젊은 날의 용기가 되살아났다.
“서울로 돌아와서 망설였던 오디션 신청서를 냈어요. 운 좋게 이 나이에 꿈을 이루게 됐지요. 아내가 많이 응원해줬는데….”
인생 드라마는 참 모질다. 어느 작가가 이런 대본을 쓸 수 있을까. 중요 배역까지 맡고 꿀맛 같은 연습에 들어갈 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평소 건강하고 활달하던 아내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나더니 얼굴이 퉁퉁 부었다. 밤에 무얼 잘못 먹고 잤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며칠 새 증상은 더 심해졌다.
정밀검사 결과 아내는 자기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혈관염을 앓고 있었고, 상태는 매우 위험했다. 이미 신장, 폐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 전씨는 제작사에 전화를 걸어 “출연하지 못 하겠다”고 말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응급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당신 절대로 꿈을 포기하면 안돼요”라며 오히려 남편을 독려했다.
수술 후 10여일간 아내는 깨어나지 않았다. 다행이 의식을 되찾은 아내는 중환자실 면회 때마다 자녀들에게 “너희 아버지 연습 다녀오셨냐, 포기하면 안된다고 말씀드려라”면서 남편을 걱정했다. 가족부양에 자신의 꿈을 삭혀 온 남편의 아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에게 그런 일만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더 이상 나빠지지만 않는다고 해도 마음을 놓을 텐데요. 아내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은 날은 연습하면서 신바람이 나요. 어디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착잡해 연기에 집중하기 힘들죠. 이런 줄 알았으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줬을 텐데 후회스럽습니다.”
얼마 전부터 아내는 눈에 이상이 생겨 남편의 모습마저 보지 못한다. 다음달 1일로 공연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나면 좋으련만. 아내는 비록 병실에 누워있지만 전씨는 마음속으로 맨 앞자리 VIP석에 아내를 앉히고 멋진 연기를 보일 것이다. 지난 세월 묻어온 열정과 아내에 대한 사랑, 안타까움이 배어 무대 위 노배우의 인생을 완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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